문학관 입주작가 첫날

[노파 문학관 : 해남] 나와 드미뜨리와 분홍 식충이

by NOPA


20260301 #1. 문학관 입주 첫날

3월 1일 오후 4시 40분, 문학관에 도착했습니다. 일산에선 아침 8시 40분에 출발했으니 8시간 만입니다. 중간에 휴게소 두 번과 주유소 한 번, 합쳐서 한 시간을 쉬었으니 총 7시간 운전했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면 8시간 반이 걸렸으니 여정은 삼십 분 정도 단축했고 수명은 십오 년 정도 단축됐습니다. 이토록 비합리적인 일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KakaoTalk_20260303_195318010.jpg?type=w1 지난 가을, 노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장수의 상징, 식충이


처음에는 겁이 나서 80에서 90킬로 정도로 정속 주행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두 시간을 달려 평택 휴게소에 도착했더니 해남 문학관까지 도착 시간이 고작 한 시간 줄어 있었습니다. 이미 두 시간이나 고속도로를 달려 피로가 잔뜩 쌓였는데, 앞으로도 네 시간을 더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실제로는 다섯 시간 반을 더 가야 했습니다.)


KakaoTalk_20260303_195318010_02.jpg?type=w1 평택 휴게소에서 까먹은 유부초밥 도시락. 지쳐서 먹으니 단 고무줄 맛이었음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며 다시 정속으로 열심히 한 시간 반을 달려 예산 휴게소에 도착하니 이번엔 세 시간 반을 더 달려야 한다고 나와 있었습니다(실제로는 네 시간을 더 달렸습니다).


한 시간 반이나 달렸는데, 고작 30분이 줄어든 겁니다. 이렇게 가다간 오늘 안에 도착 못 하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그때부터 밟기 시작했습니다.

KakaoTalk_20260303_195318010_17.jpg?type=w1 강한 심장을 지닌, 나의 드미뜨리

나의 드미뜨리는 강한 심장을 지닌 녀석이었습니다. 백십, 백이십으로 밟으면 악 소리를 내면서도 거침없이 질주했고, 앞에서 정속 주행하는 차가 있으면 그 귀여운 차 확 밀어버리기 전에 썩 비키라며 맹렬하게 추월했습니다. 참으로 사내다운 맛이 있는 녀석입니다.


그렇게 모든 신경을 도로의 끝에 집중해 백이십을 밟으며 왔더니, 촌장님(문학관 운영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내외분이 제 얼굴이 너무 좋지 않다고, 어서 들어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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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앞에 바다가 보이는 아름다운 문학관


20260302 #2. 문학관 입주 둘째 날

저는 드미뜨리처럼 강한 심장을 지니지 못하여 이틀을 앓아누웠습니다. 문화재단에 신청할 것도 있고, 엔카 상담원과 마지막 서류 작업도 해야 하고, 보험과 하이패스 결제 안 된 것도 해결해야 하는데, 이틀 동안 도저히 책상에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극심한 두통과 몸살 기운으로 끝없이 졸리고 누워있고만 싶었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장거리 운전에 치를 떠나 봅니다. 그렇게 아까운 이틀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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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간 거주할 숙소 앞에 놓인 식료품. 고맙습니다


20260303 #3. 입주 작가 3일 차

3일 차부터 비로소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어 급한 일부터 처리한 후 바다를 걷고, 동네를 돌고, 개들과 인사를 나누고, 카페에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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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틀간은 몰랐는데, 문학관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에 촌장님의 얼굴이 곳곳에 숨어 있었습니다. 마치 월리를 찾아라처럼, 화장실 잡지 걸이에도 촌장님이 있습니다.


조금도 이상한 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재를 들여 이 엄청난 규모의 문학관을 세울 만큼 비범한 이타심을 지닌 분입니다. 그저 자신의 얼굴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문학관을 세워 작가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사명으로 삼는 분이라면, 얼굴을 깃발에 새겨 동네 어귀에 나부끼게 한들, 무엇이 대수겠습니까. 그 아래서 물개 박수를 치고 있겠습니다. 얼마든지 하십쇼, 훌륭한 분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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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관 운영으로 이번에 문체부 장관상도 받으셨다


그리고 너, 드미뜨리여,

우린 만난 지 5일 만에 함께 450킬로를 달린 사이다.

종종 삶에서 부족한 부분이 느껴질 때마다 남자를 만나야 하나 생각했는데, 차를 사면 될 일이었다.

나와 드미뜨리(와 흰 당나귀). 마치 위대한 커플의 탄생처럼 들린다.


드미뜨리야,

이제 우린 해남의 모든 곳을 샅샅이 뒤질 것이고, 풍광이 좋은 곳을 만날 때마다 함께 바라볼 것이며, 앞으로 반도의 모든 산을 너와 함께 누빌 것이다.


사람들은 네가 12살이 넘었다고, 이미 13만 킬로를 달렸다고, 의심하라고, 안심해선 안 된다고 겁을 주지만, 난 벌싸 8년 후 너의 스무 살 기념일을 챙길 생각을 하고 있다. 너를 고치고 또 고치면서 20만 킬로가 넘도록 탈 것이다. 어쩌면 30만 킬로까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너보다 좋은 차는 만나지 못할 테지. 넌 처음 본 순간부터 나의 드미뜨리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시샘하는 말 따윈 듣지 말거라. 응앙응앙 우는 건 흰 당나귀나 하는 짓이다.


드미뜨리는 전사의 발!

20만, 30만 킬로가 될 때까지 묵묵히 달리거라. 흠집 하나 내지 말고 날렵하게, 나의 친애하는 드미뜨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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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드미뜨리와 분홍 식충이. 최고의 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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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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