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문학관 : 해남] 4일차. 동백과 매화
20260304
#1. 오늘 가장 행복한 사람
오늘 한국에서 가장 행복했던 사람은 나다. 오늘만큼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 숨 쉴 때마다 오른쪽 콧구멍에서 행, 왼쪽 콧구멍에선 복,을 느꼈으니까. 사람이 하루에 호흡하는 횟수가 평균적으로 2만 번이라고 하니 나는 오늘 2만 번 가량 행복했던 셈이다.
눈을 뜨자마자 바다를 볼 수 있었고,
아침부터 문학관 카페를 독점할 수 있었고,
점심에는 친구의 직장을 찾아갔다가 완도로 건너가 라멘을 얻어먹었고,
다시 친구의 직장으로 돌아와선 친구의 상사와 셋이서 수다를 떨었다(시골은 친구의 상사와도 친해지기 쉽다. 전체 직원이 관장님과 친구, 둘 뿐이기 때문이다).
돌아갈 땐 관장님이 아들이 직접 키운 거라며 방울토마토 한 상자와 명절에 어딘가에서 받은 거라며 천혜향 두 개를 선물해줬고,
드미뜨리는 구불구불한 해안 도로를 이탈해 바다로 뛰어드는 일 없이 나를 안전하게 바래다줬으며,
해가 지기 전에 새로 개척한 산책길에선 이제 막 피어난 매화와 동백을 보았다.
정말이지 오늘만큼은, 나보다 행복한 하루를 보낸 사람은 없을 거라고 감히 단언해 본다.
#2.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한 것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되는 건, 행복을 얻기 위해 돈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지극한 행복을 얻기 위해 내가 쓴 돈은 고작 세 사람의 커피값뿐이었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
근육이다. 코어에 근육이 있으면 오래 걸을 수 있고, 엄혹한 겨울이 지나간 자리를 싸묵싸묵 걷다 보면 단전 깊이 충만감이 올라온다. 걷는 동안 오른쪽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산이 보이면 행복의 밀도는 무한대로 깊어진다. 이래서 자꾸만 시골로 내려오는가 보다.
그러나 모든 시골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므로 덮어놓고 환상을 가지는 것은 곤란하다. 바다에 인접하면서 여자 혼자 돌아다녀도 안전한 공간에 있으려면 꽤 많은 운이 따라야 한다.
저번에 두 달 살이를 했던 펜션은 제일 가까운 수퍼에 한 번 가려면 차도를 한 시간을 걸어야 했고, 숙소에서 바다는 보이지도 않았으며, 밤이 되면 길이 새까매져 까딱 잘못하다간 옆에 있는 저수지로 추락하기 딱 좋았다. 아마 이게 진짜 시골의 현실일 것이다. 인구 소멸은 갈수록 심해지니 앞으로 이런 곳이 더 늘어나겠지.
그러니 오늘 내가 누린 행복은 조만간 사라질 모래성 위에 쌓은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신기루가 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걷고 보고 그 풍경 안에 머물고 싶다. 하루하루 지나가는 날들이 너무 아쉽다.
그러니 다들 어린이처럼 뛰어 나가서 걷고 보고 음미하시길. 봄은 아주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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