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문학관 : 해남] 5일차.
20260305
#1. 관종과 시인
함께 입주한 작가분 중 한 분이 자신의 시집을 한 권씩 선물했다. 각각의 책에 열 사람의 이름을 적어서 단정하게 봉투에 담아 주셨다. 그런 일을 한 적이 없는 나는 내가 모르는 정성을 접할 때마다 물씬 감동을 느낀다. 시인은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시집 선물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시인의 이력이다. 오랫동안 시 공부를 하다가 몇 년 전 계간지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하셨다고 했다. 그때 시인의 나이가 일흔. 그 오랜 열망과 집요함에 전율이 느껴졌다. 나의 문우들도 이렇게 오래된 열정으로 모두 작가가 되면 좋겠다. 그리 될 것이다.
시집을 들고 문학관 잔디밭 벤치에 앉았다. 유독 흐린 날이었고, 내 방은 해가 들지 않는 북향이라 한 조각의 볕이 필요했다. 그런데 밖에서 시를 읽고 있으니 내가 좀 관종처럼 느껴졌다. 여기 앉아 있으면 문학관 이쪽 저쪽에서 내 모습이 보이는데, 나는 시 읽는 내 모습을 전시하고 싶은 것인가? 가만 보니 조금은 그런 마음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가을바람을 잘라서 대문을 만들고
별들의 반짝임으로 문패를 만들었다
잎에 매달린 이슬을 떼어내어 베갯속에 넣어두고
달무리를 끌어내려 이불도 준비했다
그와 내가 낡은 스웨터처럼 등을 맞대고 누우면
땔감을 쌓아 올린 반대편 계단에서
발가락을 핥고 있는 새끼 고양이 숨소리
김소영의 <겨울 예감> 중-
한 땀 한 땀 꿰어놓은 시어들이 너무 좋아서, 아... 하며 바다 한 번 보고, 다시 아, 하며 하늘 한 번 보고. 대낮부터 이게 무슨 사치인가! 아주 비싼 별미를 먹는 것 같아 시를 슥슥 읽는 게 아까웠다.
*
늦은 오후엔 문학관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산책을 했다. 산책길은 험하지도 않고, 그리 긴 거리도 아니었다. 제대로 다 돌았다면 만오천 보 정도 되는 거리? 그러나 작가들은 연약했다.
일흔 넘은 시인이 제일 먼저 백기를 들었고, 쉰에 가까운 작가도 힘에 겨워했다. 겨우 만 보를 넘겼을 뿐인데 걷기를 중단하다니! 그분들께 스쿼트를 권했다. 쓰는 인류에겐 정말 스쿼트가 필요하다.
생각 같아선 이대로 파워를 올려 홀로 문학관까지 걸어가고 싶었으나 사람이 저 좋은 일만 하고 살 순 없는 법이다. 특히 나처럼 혼자 오래 산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회성이 바닥을 치고 있으니 이럴 때만이라도 인류와 보폭을 맞추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시인이 더는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자신이 쏘겠다며 식당에서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나는 외식도 싫고, 그저 전속력으로 걸어가 스쿼트 2백 개를 때리고 정수리를 얼릴 듯한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한 후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고 싶었으나, 오늘은 보폭을 맞추기로 한 날이다.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밥값은 각자 계산하자고 했다. 드미뜨리 때문에 출혈이 커서 돈을 아끼고 싶었으나, 시인은 아마 본인이 제일 연장자이기 때문에 쏘겠다고 한 것일 테다. 부담을 혼자 지게 하고 싶진 않았다. 일흔 넘은 시인이 무슨 돈이 있겠어.
시인도 큰 저항 없이 수긍했고, 부담을 나눠진 우리는 갈치 백반과 해물된장찌개를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인당 12,000원.
해남은 밥값이 좀 비싼 편이다.
*
비가 온다고 촌장님이 우리를 차로 데리러 오셨다. 나는 소화도 시킬 겸 까만 시골길을 파워워킹으로 질주하고 싶었으나 거듭 말하듯, 사람이 저 좋은 일만 하고 살 순 없는 법이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며 차에 올랐고, 뱃속에 소화되지 않은 갈치와 무와 멸치를 담은 채 5분만에 문학관에 도착했다.
방에 들어가마자 스쿼트 200개를 했다.
토할 뻔했다.
시인이 내일 같이 섬에 가자고 했으나 거절했다. 내일은 보폭을 맞춰 걷는 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류와 보폭을 맞추는 일은 참으로 즐거우나 고된 일이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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