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문학관 : 해남] 6일차.
20260306
#1. 입주 작가의 일상
드디어 일과가 잡혔다. 오후 두 시까지 문학관 까페에서 뭔가를 쓰고, 두 시 반쯤 산책을 나간 후 다섯 시 반 즈음에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8시에 일상을 기록하고 10시에 잠들기. 그런데 오늘도 11시를 넘겼군.
문학관 촌장님이 작가들이 애용할 줄 알고 정성껏 카페를 만들어놨으나 그간 아무도 이용을 안 해 내심 서운해하던 터였다. 그런데 내가 매일 같이 나와서 뭔가를 끄적이는 시늉을 하니 조금 뿌듯하신가 보다.
문학관으로 찾아온 마을 사람에게 커피를 대접하려고 카페로 왔는데, 노상 비어 있던 공간에 누군가 앉아 키보드를 타닥이는고 있으니 남들 보기에 좋았나보다. “어, 여긴 우리 작가님”하고 소개하시는 목소리가 살짝 들떠 있었다. 입주 작가가 관종인 게 꼭 나쁜 일은 아닌 듯하다.
#2. 당할머니 사당
어제 못다 한 산책을 오늘 원 없이 해보려고 해변길을 따라 쭉 걸었더니 당할머니 사당이 나왔다. 작년에 매일 같이 걸었던 땅끝 탑 산책로에 당할머니 동상이 있어서(땅끝의 유명인사다) 사당에도 한 번 가봐야지, 했으나 결국 못 가서 아쉬웠는데, 이렇게 보게 되다니 무척 반가웠다.
당할머니 사당은 마치 “스산함”이라는 개념을 모든 것으로 구현한 곳 같았다. 안그래도 오늘 날씨도 음산해서 시선이 닿는 곳마다 으스스하고 서늘했는데, 사당은 스산함의 절정이었다. 영험한 할머니에게 딱 어울리는 공간 같았다.
바닷가 마을은 워낙 사람이 파도에 잡아먹히는 일이 잦아서 영험한 할머니가 한 분쯤 계시기 마련인데, 이분의 명성은 멀리 경상도에까지 자자했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전체가 할머니를 모시는 걸 보면 역시 자연 앞에선 이성이고 과학이고 참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다. 기독교나 불교 같은 주류 종교도 끼어들지 못한다. 오직 신빨 잘 받는 할머니한테 매달리는 게 최선인 것이다.
“할매, 나도 좀 잘 봐주소"
#3. 시골에서 여자 혼자 산책할 때 생기는 일
시골 야산엔 곳곳에 괜찮은 임도가 나 있는데, 언제나 혼자 다니지 말라고들 한다. 그럴 필요 없다. 다녀도 된다. 워낙 인적이 드물어서 겁을 내는 것인데, 겁이 나면 그냥 겁이 나는구나, 하면서 가면 된다.
시골에서 몇 달 살아보니 임도보다 훨씬 위험한 게 차도에 붙어있는 보도다. 여자 혼자 시골 보도를 걷고 있으면 꼭 내 걸음에 맞춰 속도를 잔뜩 늦춰 따라오는 차들이 있다. 더 느리게 걸으면 저만큼 앞에 가서 비상등을 켜고 기다리기도 한다.
오늘도 그런 차를 두 대나 마주쳤는데, 제발 쓸데없는 호기심 갖지 말고 가던 길 계속 가셔라. 그럴 때마다 시골길에서 강간 살해당한 여자들 사건이 떠올라서 구텐탁씨를 칼집에서 꺼내놓은 상태로 걷는 중이니, 서로 험한 꼴 안 보게 그냥 가시라고요.
그런 보도에 비하면 임도는 오히려 안전하다. 사람과 마주치더라도 서로 긴장이 역력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스쳐갈 뿐이다. 다행히 당할머니한테 인사까지 올렸으니 오늘은 죽지 않을 것이다.
여자 혼자 시골길을 산책한다는 건 늘 이런 식이다. 혹시 미친 사람 만나서 죽으면 어떡하지? 에 관한 생각을 안 한 적이 없다.
그러나 길이 있고, 바다가 아름답고, 사람은 어차피 죽는다. 걸어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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