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 문학관 : 해남] 43일차.
20260412
#1. 솔직히 얄미웠어
문학관에 한 달하고 열흘 남짓 살면서 이곳만의 특성을 알게 됐는데, 여기는 느지막이 시를 쓰기 시작한 퇴직자들이 주로 오는 곳이다. 한창 때는 열심히 근로하여 가계를 탄탄히 꾸린 후 퇴직 즈음 시를 쓰기 시작해 인생 후반부는 시인으로 살기로 결심한 분들. 나와 전혀 다른 생애 주기로 사는 분들에 대해 때로 질투가 났다.
일을 하지 않아도 연금이 나온다니. 집이 두 채라니. 그 와중에 강의도 한다니!
여기서도 강의를 알아고, 첫 문장 레터를 쓰고, 지원금을 알아보고,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느라 늘 분주한 나로서는 생계 걱정 없이 쓰기만 해도 되는 그분들이 부러웠다.
실은 얄미웠다. 그렇게 여유가 있는데 비용을 칼같이 갹출하는 것이 얄미웠고, 사줄 것도 아니면서 자꾸 왜 안 먹고 가냐고 묻는 게 얄미웠고, 1억7천만 원짜리 차를 타면서 가난한 시인 얘기로 너스레를 떠는 게 얄미웠다.
그래서 혼자 다녔다. 늘 그랬던 대로. 혼자 산책을 다니고, 혼자 해변에서 책을 보고, 혼자 쑥을 캐고, 혼자 산을 다녔다. 빠르게 걸었고, 어떨 때는 와다다 뛰어다녔다. 가방 속엔 언제나 책과 등산 방석과 보온병과 채집용 봉지를 담고서(쑥을 캐야 하니).
어느 날 에코백 위로 삐죽 나온 등산 방석을 본 작가님이 산책을 다녀오는 거냐고 물었다. 해변에 갔다오는 길이라고 했더니 작가님은 “부러워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먼 곳까지 걸어다닐 수 있는 내 건강한 다리가 부럽다고 했다. 자신은 다리를 다친 후로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는다면서.
나는 시간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그의 돈이 부러운데, 그는 원하는 곳을 마음껏 다닐 수 있는 내 다리를 부러워했다. 나에게도 그가 부러워할 만한 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가 얄밉지 않아다.
오늘 촌장님이 다 같이 칼국수를 먹자고 했다. 좋다고 했다. 혼자 다니기로 한 이후 두 번인가 함께 밥먹자는 걸 거절했었다. 이젠 같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새벽부터 월출산에 갔다가 120키로씩 밟아서 간신히 약속 시간을 맞췄다.
13년 된 중고 모닝에서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정신없이 내리는 나를 보며 작가님이 다시 부럽다고 했다. 내 젊음이, 활기가, 건강이 부럽다고 했다. 나는 작가님의 1억7천만원짜리 외제차와 빛나는 시계와 고급스러운 신발을 흘깃 보다가 금방 돌아오겠다며 내 방으로 와다다 뛰어갔다.
나 역시 내 젊음이, 활기가, 건강이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길어야 15년. 그 후엔 내게도 젊음이 없을 것이고, 1억7천만 원짜리 외제차는 더 없을 것이고, 빛나는 시계와 고급 신발도 없을 것이다. 공무원 연금도 없으면서 대출은 그때도 갚아야 하니 나는 작가님 나이가 되어도 쓰기만 해도 되는 일상은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걷고, 뛸 수 있을 때까지 뛰어야 한다. 매일 산책을 나가고, 시간이 날 때마다 산을 올라야 한다. 누굴 얄미워할 시간이 없다.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이 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누려야 하니까. 내 젊음과 활기와 건강을.
그러니 나의 가난한 사이버 친구들아, 얼른 나가서 뛰어놀아라. 외제차 있어도 건강 잃으면 다 소용없다는데, 우린 외제차도 없을 것이고 건강은 원래 늙으면 잃는 것이니 부지런히 나가 놀아야 한다.
그중 온 몸과 온 정신으로 오롯이 놀 수 있는 방법이 등산이다. 돈도 없어도 된다. 오직 도시락과 건강한 두 다리만 있다면! 그러니 어서 산을 타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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