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6 장흥 천관산
#1. 산꾼이 꼽은 제일 예쁜 산
산을 많이 타신 분에게 제일 좋았던 산이 어디냐고 여쭈자 장흥 천관산이라고 했다. 그래서 갔다.
두륜산을 아주 좋아하는데 최근에 월출산이 더 예쁘다는 걸 알게 됐고, 이번에 장흥에 가서 천관산이 월출산보다 더 예쁘다는 걸 알게 됐다.
월출산은 계단 지옥을 꽤 오래 뚫어야 하는데, 여기는 계단도 그리 많지 않고, 한 시간도 오르지 않아 시야가 환해지면서 놀라운 풍광이 조망된다.
내가 해남에 안 왔다면, 또 문학관에서 산 좋아하는 분을 만나지 않았다면, 장흥에 천관산이 있다는 사실을, 그 산이 여지껏 가 본 중 최고로 예쁜 산이 될 거라는 사실을 영영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역시 사람은 사람이 사는 곳 주변을 맴돌아야 하고, 남의 말은 일단 들어봐야 할 일이다. 그 덕에 아주 뜻밖의 경험도 하게 됐다.
#2. 천관산 개요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는 도립공원으로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내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 중 하나로 꼽힌다. 주봉인 연대봉의 높이는 723m로 아주 높진 않다.
주소는 “천관산도립공원무료주차장”을 찍고 오면 되는데, 이름과 달리 무료가 아니다. 경차 천 원.
그래도 이름이 무료 주차장인지라 대단한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자 직원분이 마음이 안 좋았던지 내가 차 댄 곳까지 와서 안내 책자를 한 부 주고 가셨다.
주차비도 받으시고 화장실 청소도 하시고 주차장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하시는 듯했는데, 아주 친절한 분이셨다. 8시 반에 올라간 사람이 5시가 다 돼서 내려오니 어쩌다 이렇게 늦게 내려왔냐고 걱정도 해주셨다.
아, 일이 좀 있었습니다.
#3. 천관산에서 있었던 일
무슨 일이 있었냐면, 남들처럼 곱게 금강굴 코스로 올라가서 환희대에서 바로 정상을 찍고 양근암 코스로 내려오려고 했는데, 그랬다면 남들처럼 정오에는 내려왔을 텐데, 막상 환희대에 가보니 표지판에 정상과 반대 방향으로 1킬로쯤 더 가면 우리나라 1대 적멸보궁인 탑산사가 나온다고 써 있었다.
적멸보궁은 부처님 사리를 모신 탑이 있는 사찰로, 우리나라에 다섯 개밖에 없다. 그런데 그 최초 적멸보궁이 이곳 천관산에 있다니! 내가 해남에 왔고, 문학관에서 산 좋아하는 교수님을 만났고, 그분이 천관산을 꼭 가보라고 했고, 그래서 계획에도 없던 장흥 천관산에 오게 된 이 모든 우연이 결국 탑산사에 가기 위함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가기 싫었다. 산을 한 번 오르면, 경주마처럼 정상 딱 찍고, 거기서 신선처럼 밥 딱 먹고, 한량처럼 설렁설렁 내려오고 싶어진다. 중간에 1킬로나 빠져서 어딜 들렀다가 오는 건 정말로 하고 싶지 않다.
심지어 탑산사로 가는 길은 경사가 아주 급한 계단식 내리막길이었다. 지금은 내려가지만 돌아올 땐 저 계단을 고스란히 다시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너무너무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이미 탑산사를 향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음이 먼저라고 생각하지만, 몸이 먼저인 순간도 많다. 몸이 한 번 결정을 내리면 마음은 그저 따라야 하는 순간들. 난 정말 이 계단을 다시 올라오고 싶지 않은데 몸이 하겠다고 나서니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몸과 마음, 마음과 몸.
#4. 불경스러운 마음
울며 겨자먹기로 내려 가다가 아주 희한하게 생긴 바위를 봤다. 너무 적나라하게 불쑥 솟아 있어서 보나 마나 남근바위일 거라고 생각했다. 밑에서 보니 더욱 심하게 그리 생겨서, 이건 분명 이름난 남근바위일 거라며 표지판을 찾았다.
예상대로 바위는 이름난 바위였고, 그 이름은 아육왕탑이었다. 2100년 전 인도 아육왕이 부처님 사리를 모셔 와 우리나라에 세웠다는 바로 그 최초의 진신사리탑.
이 불경스러운 년. 너는 이제 벼락을 맞겠구나.
그러나 부처님은 그냥 자애로운 분도 아니고 대자대비한 분이므로 나는 벼락 대신 차를 받았다. 암자나 다름없는 작은 규모의 탑산사를 어슬렁거리니 그곳에서 홀로 수행 중이던 노스님이 차나 한잔하고 가라며 부른 것이다.
백년도 넘었다는 철주전자로 끓인 물로 우린 보이차를 대접받았고, 차를 마시는 내내 문밖으로 흔들리는 풀들을 보았다. 그제야 싫은 마음도 음란한 마음도 모두 비워지고 평화롭도 좋다는 감정만 남았다. 마치 평안함이라는 감정을 난생 처음 경험해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안정적이고 충만했다.
아, 나는 이걸 경험하려고 여기에 왔구나.
스님은 고등학생 때 5.18을 경험하셨고, 유신 정권 때 대학을 다니며 함께 운동하는 친구들이 매년 한 두 명씩 경찰 진압에 죽는 장면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셨다. 그리고 수행자가 된 자신의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고, 자신이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셨다. 스님은 그런 확신에 걸맞는 얼굴을 하고 계셨다. 어디에도 거짓은 없었다. 부러웠다. 그 단단한 확신과 선택이.
산속에서 혼자 살면 밤에 안 무섭냐고 여쭸다. 스님은 뭐가 무섭냐고 되물으셨다. 얼마 전에 밤중에 산길을 가려다가 귀신이 나올 것 같아 포기했던 게 생각나서 답했다.
음... 귀신이요! 혹시 귀신 본 적 없으세요?
굉장히 인자한 인상의 스님이셨는데, 그 인자한 미소를 잃지 않고 답하셨다.
제가 실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래서 귀신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아요. 대신, 귀신 붙은 사람은 많이 봅니다.
내 얘기를 하시는 건가 싶어서 괜히 찔렸다. 살면서 귀신 같다는 소리를 굉장히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귀신 붙은 사람이 누군데요?
그건 바로...
(다들 내가 웹소설로 등단했다는 걸 자주 잊는다. 웹소설 작가는 어디서 잘라야 할지 잘 안단 말이지. 심지어 나는 라디오드라마 작가 출신이다. 애 태우는 덴 달인이다)
***
지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
https://blog.naver.com/nopanopanopa/224205953839
#노파의글쓰기 #어느날글쓰기가쉬워졌다 #글쓰기 #글잘쓰는법 #노파 #김수지작가 #에세이 #문해력 #어휘력 #감성글 #해남여행 #문학관 #입주작가 #땅끝마을 #천관산 #5대명산 #장흥 #천관산코스 #등산후기 #탑산사 #적멸보궁 #아육왕탑 #진신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