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집은 우리 집을 제외하고 이사가 잦았다. 옆 집의 자매들도 얼마 안가 경기도의 아파트로 이사를 갔고, 새롭게 남매가 이사를 왔다. 위로는 나보다 세 살이 많은 남자아이와 아래로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여자아이였다. 그전에 살던 자매들은 성격이 불같고 깍쟁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함께 놀다가도 기분이 나빠지는 일이 많았는데 이번에 이사 온 남매들은 성격이 유순하고 털털해서 별 탈 없이 잘 지냈다. 자매들의 성격은 그들의 엄마와 닮아 있었고, 남매들의 성격이 그들의 엄마와 닮아 있었는데 아마 그 시절 나도 우리 엄마의 성격을 닮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는 그렇게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었고 일을 하러 나가지 않는 날에는 집에서 나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친구라고 데리고 오는 사람도 없었고, 만나러 나가는 일도 없었다. 이웃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이사를 가고 나면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거나 만나는 일은 없었다.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오면 또 사이좋게 지내다가 이사 가면 쿨하게 헤어졌다. 그런 엄마의 성격을 닮은 탓인지 나도 헤어짐과 만남에 굉장히 쿨한 편이다. 가끔 친구를 만나긴 하지만 더 많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거나 오래된 친구와 연락이 소원해져도 섭섭해하거나 억지로 연락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는 항상 아빠 딸 아니고 엄마 딸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하는데, 지금의 내 나이가 그 당시 엄마 나이와 비슷한 정도이니 그 당시의 엄마는 지금의 나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새로 이사 온 또래의 여자아이와 마음이 잘 맞았던 것도 있지만, 그 집에는 우리 집에 없는 것이 있어서 자주 놀러 갔다. 바로 백 권이 넘는 동화전집이었다. 동화책을 보기 위해 놀러 간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아주머니는 책을 좋아하는 나와 함께 있으면 남매들이 책을 더 많이 읽을 것이라 기대해서 내가 놀러 가는 걸 좋아했다. 물론 남매들은 책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동화전집은 항상 내 차지였지만... 다양한 이야기와 그림체의 동화 속에 푹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동화가 한 편 있다.
한 여자가 스파게티를 너무 좋아해서 하루 종일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스파게티를 맛있게 먹는 여자를 보고 남자는 사랑에 빠졌고, 둘은 결혼했다. 여자는 결혼식날도 스파게티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날씬했던 여자는 스파게티를 너무 많이 먹어서 뚱뚱해졌지만 남편은 어김없이 여자를 사랑했다. 뚱뚱해져서 외출하기 힘들어진 여자를 위해 바퀴 달린 의자를 만들었다. 여자는 여전히 스파게티를 먹으면서 의자에 앉았고, 남자는 힘껏 의자를 밀어서 외출을 했다. 즐겁게 산책을 하던 두 부부는 행복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의자는 여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고 말았다...
따뜻한 색감의 그림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스파게티 그림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스파게티를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엄마도 제대로 된 스파게티를 만들어 본 적이 없으니 밖에서 먹어봤던 기억을 더듬어가며 만들어주었다. 당시에 엄마가 만들어준 스파게티는 토마토케첩 맛이었다. 잘게 다진 양파와 다진 돼지고기를 볶다가 케첩을 넣어서 소스를 만들고 면과 버무린 일종의 나폴리탄이었다. 대단한 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촌스러운 스파게티였지만 동화 속에서 맛있게 먹던 여자의 행복한 표정을 떠올리며 나도 함께 행복한 기분이 드는 그런 맛이었다.
엄마는 동굴집에 이사 오고 얼마 안 돼서 일주일에 반은 일하러 나가고 나머지 반은 간병을 위해 친할머니네 집에 갔다. 당시 친할머니는 결핵을 앓은 후유증으로 숨도 편하게 쉬지 못하고 항상 기침을 달고 살았지만 크게 아픈 티를 내지 않았다. 내가 놀러 가면 항상 반갑게 맞이하고 엄마는 사주지 않는 간식을 사주셨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지만 걸을만한 기력이 생겨 외출할 때면 반듯하게 빗어서 올린 머리에 붉은색 립스틱을 곱게 바르고 뾰족한 구두를 신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서 걸었다. 멋쟁이 할머니와 함께 걸으면 나도 멋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깨가 올라갔다. 몸이 편치 않은 상황에서도 엄마가 일하러 나가는 날이면 종종 찾아와서 맛있는 걸 사주셨다. 혼자서 집을 지키는 내가 항상 안쓰럽다고 갈비에 피자에, 평소에 엄마는 절대 사주지 않는 음식들을 사주셨다. 엄마는 할머니 때문에 내가 어릴 때 뚱뚱했던 거라고 볼맨 소리를 하지만 집안 여자들 중에 내 키가 가장 큰 걸 보면 할머니 덕분에 잘 먹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초등학교 입학하면서부터 동굴집 근처에 있는 실내수영장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같이 다니는 친구도 없이 혼자서 수영복과 물안경, 세면도구를 챙겨서 매일 빠짐없이 수영장에 다녔다. 무서운 수영강사 선생님의 구호에 맞춰서 쉴 틈 없이 팔다리를 휘저었다. 그 덕에 수영 레슨이 끝나고 나면 온 몸에 기운이 쭉 빠져서 걸을 힘도 없었다. 엄마가 돌아와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한참은 기다려야 하니 종종 수영장 옆에 있는 햄버거 집에 들렀다.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집이었는데 공간이 협소해서 테이블은 2-3개 밖에 없었고, 따로 메뉴도 없이 햄버거 하나뿐이었다. 얇디얇은 패티에 케첩과 마요네즈를 버무린 양배추 샐러드가 속재료의 전부였지만 허기진 내 입에는 그것만큼 맛있는 게 없었다. 지금은 온갖 화려한 속재료가 들어간 수제버거집이 즐비하지만 가끔 이렇게 촌스러운 양배추 샐러드가 들어간 햄버거가 먹고 싶어 질 때가 있다.
햄버거를 다 먹고 나면 반드시 들리는 곳이 또 한 군데 있었는데, 바로 헌 책방이다. 여섯 살 때 한글을 떼고 난 뒤부터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옆 집의 백 권짜리 동화 전집도 모두 읽고, 학교 친구네 집의 전래동화, 위인전, 심지어 언제부터 꽂혀있었는지 알 수 없는 교실 책장의 책까지 모두 읽고 나니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어졌다. 그때부터 엄마에게 받은 용돈으로 책을 사기 시작했다. 새 책은 너무 비싸서 살 엄두가 나지 않았고, 헌 책방에서라면 내 용돈 내에서 살 수 있는 책이 많았다. 추리소설부터 공상과학소설, 위인전, 만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는데 만화책을 사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만화책은 책방에서 보고 다른 책을 사 왔다. 헌 책방은 항상 빽빽하게 많은 책들이 놓여 있어서 제대로 서있을 공간도 없을 만큼 좁았는데, 나는 그 좁은 복도에 서서 이것저것 책을 고르는 게 즐거웠다. 책방 아저씨도 그런 나를 그냥 내버려 뒀다.
수영장에서 돌아와 집에서 숙제를 마치고 하는 일은 대부분 비슷했는데 뒷마당에서 책을 읽거나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서 보는 일이었다. 동굴집에 이사 오면서 형편이 많이 나아졌는지 새로운 가전제품들이 속속 들어왔는데 그중에 하나가 비디오였다. 마침 집 근처에 비디오 가게가 있어서 이틀에 하루 정도 비디오테이프를 빌리러 갔다. '후레쉬맨' '바이오맨'같은 히어로물부터 '베르사유의 장미' '캔디'같은 소녀 장르까지 또 닥치는 대로 빌려서 보기 시작했고 그 장르가 점점 다양해졌다. 시리즈의 신작이 나올 때면 비디오 가게 앞에 포스터가 미리 붙었는데 출시 당일이 되면 제일 먼저 비디오 가게로 달려갔다. 비디오 가게 아저씨도 꼬마 단골을 위해서 항상 신작을 빼놓고 기다려 주었다. 게다가 난 하루면 비디오 반납을 하는 성실한 고객이었으니 아저씨가 싫어할 리가 없었다. 신작은 보통 1박 2일, 준신작이 되면 2박 3일로 대여기간이 달라졌는데 나는 대여기간과 상관없이 항상 1박 2일 반납이었고 빠를 때는 당일 반납도 있었으니 우수고객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그 덕분에 내가 아직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언니 오빠들만 볼 수 있는 영화들도 큰 제제 없이 빌려 볼 수 있었다.
동굴집은 지금의 나의 바탕이 만들어진 곳이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이 생겼지만 그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몰라서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는데, 혼자서 수영장도 다니고 서점도 다니고, 혼자서 밥도 사 먹으면서 혼자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다양한 영화와 책들을 접하면서 위인전, 전래동화보다는 공상과학소설을 좋아하고, 코미디나 로맨스보다 스릴러나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뒷마당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계절을 접하면서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보다 라일락이 활짝 피는 봄을 더 좋아하고, 벌레를 크게 무서워하지 않는 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를 신경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느껴지는 대로 받아들였다. 한 사람의 성격과 취향은 주변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만, 이때를 돌이켜보면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저절로 그렇게 되는 부분도 있는 듯하다. 이후에 다양한 집으로 이사 가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관계를 맺었지만, 이때만큼 나다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