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내 방이 생겼습니다.

by 문제없다

초등학교 4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동굴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3층짜리 벽돌집의 2층이었는데, 정면에는 3층 주인집으로 올라가는 계단만 있고, 1층과 2층, 지층에 세 들어 사는 집의 입구는 건물 뒤쪽으로 나있었다. 담벼락과 건물 사이의 좁은 길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면 맨 처음 우리 집이 나왔고, 안쪽으로 두 집이 더 있었다. 현관문을 들어서자마자 왼쪽에 가스레인지를 놓을 수 있는 싱크대가 있었고, 싱크대 맞은편에 작은방, 작은방 옆으로 화장실, 화장실 옆으로 큰 방이 있는 구조였다. 거실이 따로 없었지만 세 사람이 충분이 상을 펴고 밥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 집에 이사 오면서부터 연탄아궁이, 공용화장실이 없어졌는데 엄마는 그게 가장 기뻤던 것 같다. 추운 날 연탄아궁이의 불이 꺼지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연탄가스 걱정에 수시로 환기시키지 않아도 되고, 어둡고 냄새나는 공용 푸세식 화장실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화장실에는 샤워기도 달려있어서 언제든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내 방이 생기는 집으로 이사 간다는 사실에 너무 기뻐서 잠을 설칠 정도였다. 줄곧 내 방을 갖고 싶어 했는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초등학교 2학년 때 있었다. 학기초에 담임이 집에 텔레비전이 있는지, 전화기가 있는지 냉장고가 있는지, 방은 몇 개인지를 거수로 확인했다. 그때 단칸방에 사는 건 학급에서 나뿐이라는 걸 알았다. 이상한 조사가 끝나고 며칠 뒤, 담임은 학급의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사이즈도 맞지 않는 남아용 운동화 한 켤레를 주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대상으로 학교에서 주는 건데 왜 남아용 운동화가 왔는지 모르겠다며 본인은 여아용 운동화를 신청했다고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으니 일단 받으라며 강제로 나에게 쥐어줬다. 각 학급의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용품이나 생필품 같은 것을 나눠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담임은 방 개수와 가전제품 유무를 거수로 확인하여 그 대상자를 골랐던 것이다. 아이들은 공짜 운동화가 생긴 나를 보며 부럽다고 했지만 난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강렬한 불쾌함과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그때 가난은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 종일 어떻게 수업을 마쳤는지 모를 정도로 기분이 나빠서 어지러울 정도였다. 집으로 돌아와 받은 운동화를 엄마에게 보여주며 우리 집이 가난해서 이런 걸 받는 거냐라고 물었을 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어떻게 대답해 줘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내 방에 대한 욕구가 강렬해졌다. 방이 두 개라는 것은 가난하지 않다는 뜻이고, 가난하지 않으면 이렇게 부끄러울 일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운동화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내 방에 대한 욕구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좁은 방이어도 친구들을 자주 불러서 함께 놀았고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데에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방뿐만 아니라 내 것에 대한 욕구가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에 물건이나 먹을 것이 생기면 누군가와 나누는 것에 익숙했고 없으면 없는 대로 만족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 날 이후로 나는 내 것에 대한 소유욕이 강해졌다. 게다가 친구들을 집에 부르지 않게 되었고 무언가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항상 주눅 들어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 집이 단칸방이라는 사실이 강제로 공개되었고, 달라고 하지도 않은 남아용 운동화를 강제로 받은 기억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지금도 그 날의 분위기, 담임과 아이들, 엄마의 표정, 운동화 디자인까지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다. 그래서 방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잠을 설칠 정도로 설레었다. 그 당시 일기의 대부분이 이사 가는 집과 내 방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 차있을 정도로 기뻤다.


이사 가기 얼마 전, 엄마는 마음에 드는 책상과 침대를 직접 고르라며 집 근처에 있는 작은 가구점에 날 데리고 갔다. 도로변에는 커다란 고급 가구를 파는 가구점들이 즐비했지만 우리 집 형편에 그런 곳에서 가구를 고를 수는 없었고, 저렴한 원목 가구를 판매하는 시장 뒤편의 가구점이었다. 선택지가 많지 않아서 가구점 사장님이 추천해주는 걸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침대 헤드가 달린 검은색 싱글 사이즈의 침대와 책장이 딸린 연회색과 흰색의 중간쯤 되는 책상을 구입했다. 사장님의 수완 좋은 말솜씨에 넘어가 엄마는 책상과 같은 색상의 서랍장도 함께 구입했다. "이제 책상이 생기니까 공부 열심해해야 한다."며 이야기하는 엄마는 나보다 조금 더 신나 보였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엄마의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했지만, 운동화 사건이 있던 날 엄마는 나보다 더 많이 상처 받지 않았을까? 어린 딸에게 들은 부당한 담임의 행동에 맞서 당당하게 항의하지 못했던 엄마도 그날 밤 나만큼 잠을 설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이사 당일날 새 가구가 도착하고 내 좁은 방을 침대와 책상, 서랍장이 꽉 채웠다. 책상에서 의자를 빼면 여유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로 좁았지만 내 방이 생겼다는 것, 무엇보다 책상이 생겼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책상 앞에 앉아서 책과 필기구들을 어떻게 배치할지 생각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부러워했던 책상을 떠올리며 그동안 조금씩 모았던 책들은 책장의 가장 윗 쪽에, 교과서와 공책들은 손이 닿은 아래쪽에, 필기구들은 서랍에 나란히 놓았다가 다시 꺼내기를 여러 번 반복하며 내가 가장 만족하는 배치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이제 혼자 자야 하는데 무섭지 않겠냐고 물었고 나는 씩씩하게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대답했지만 익숙하지 않은 매트리스의 푹신함과 새 가구 냄새 때문에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더 이상 우리 집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친구들을 다시 집으로 데리고 올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은 한결 가벼웠다.


이층 집에 이사 오면서 자주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당당하게 친구들과 놀 수 있는 내 방이 있으니까 우리 집에 놀러 오라는 이야기도 하기 쉬웠다. 낮 시간 동안 어른이 없는 우리 집은 곧 우리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방과 후에 정해진 3-4명의 친구들과 함께 군것질거리를 사서 우리 집으로 향했다. 좁디좁은 내 방을 꽉 채운 우리들은 병원놀이, 유치원놀이, 눈 가리고 술래잡기 등, 땀이 삐질삐질 날 정도로 최선을 다 해서 놀았다. 오후 늦은 시간이 다가오면 친구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친구들과 놀았던 흔적을 깨끗하게 치우고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그 무렵부터 어떻게 하면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혼자서 하던 놀이를 친구들과 하는 일이 많아졌고 혼자 하던 등하교를 친구와 함께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던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일하느라 바쁜 엄마도 내 생일에는 직접 만든 음식들로 생일상을 차려줬다. 이층 집에 이사 와서 맞이하는 생일에 처음으로 같은 반 친구들을 초대했다. 엄마에게는 한 5명 정도 올 것 같다고 이야기해놓고 제일 먹고 싶은 메뉴로 돈가스를 주문했다. 엄마는 그 당시 고모가 오픈한 일식 돈가스 식당의 주방일을 도와주고 있었는데, 식당에서 익힌 노하우로 집에서 종종 돈가스를 만들어줬다. 통통하게 튀긴 돈가스와 직접 만든 소스는 바깥에서 먹어본 그 어떤 돈가스보다도 맛있었다. 학교 친구들을 처음 데리고 오는 생일잔치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돈가스 외에도 김밥, 과자, 케이크, 음료수 등 다양한 간식들을 준비해 줬다.


생일 당일날, 초대한 친구들에 초대하지 않은 친구들까지 더해져 모두 20명 넘게 찾아왔다. 어쩌다 보니 학급의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참석하는 거창한 생일파티가 되어버렸는데, 안방에 큰 상을 놓고도 앉을 공간이 없어서 거실에 작은 상까지 펼쳐서 모두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준비해 놓았던 음식들도 금세 동이 나서 엄마는 쉴 새 없이 돈가스를 튀겨서 날랐다. 먹성 좋은 아이들은 새로 튀긴 돈가스가 오는 족족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고, 재료가 다 떨어진 후에는 간식들을 사다 날랐는데 그것들도 금세 바닥을 보였다. 배부르게 먹은 우리들은 집 앞 공터에서 피구를 하고 지치면 다시 들어와서 간식을 먹고 쉬다가 다시 나가서 피구를 하면서 날이 저물 때까지 놀았다. 엄마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친구들을 맞이하면서 계속해서 음식을 만들어줬는데 힘든 내색 하나 없이 반갑게 맞이했다.


주중의 대부분을 일하러 나가거나 할머니 병간호를 하느라 내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모르는 엄마는 찾아온 많은 친구들을 보고 내가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안심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내내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반장을 했지만 엄마는 학년 초 학부모 모임을 제외하고 학교에 찾아온 적이 없었다. 다른 반장/부반장 엄마들은 수시로 담임을 찾아와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줬다. 흰 봉투가 들어있는 박카스 상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런 것들도 흔했다. 학년별로 반장/부반장 엄마들의 모임도 있었는데 학교의 대소사에 시시콜콜 간섭했다. 자주 얼굴을 비추는 엄마들의 아이들이 대부분 공부를 잘했고, 상장을 많이 탔고, 매년 반장/부반장을 했으며, 선생님의 예쁨을 받았다. 엄마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촌지를 줄만한 금전적 여유도 없었고, 자주 얼굴을 비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어른들의 치맛바람과는 별개로 순수한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친구과 함께 놀았고, 엄마들이 나눠준 간식은 맛있게 얻어먹었지만 자신들이 뽑고 싶은 친구를 반장으로 뽑았다.


이렇게 내 방이 생긴 기쁨도 잠시. 얼마 후 내 방은 다시 없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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