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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랑망고 Jun 26. 2023

파이프오르간의 한계라고 생각했던 그때

<올리비에 라트리 오르간 리사이틀> 롯데콘서트홀

수천 개의 파이프와 수십 개의 스탑으로 빚어내는 다채로운 음색.  

단선율부터 오케스트라 선율까지 표현해 내는 악기의 제왕.  

제작부터 설치까지 수년이 걸리는 오르간 빌더 장인의 걸작품.  


파이프오르간을 수식하는 설명이다.

실물을 마주하면 수긍이 안 갈 수 없다.


오르간 콘솔이 설치된 롯데콘서트홀 무대


다만 이런 건 있다. 오스트리아 리거(Riger)의 것이냐 캐나다 카사방(Casavant)의 것이냐 제조사에 따라 구현할 수 있는 음색차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소리를 내는 주체는 파이프오르간이라는 단일 악기다. 수십 여개의 소리를 낸다 한들 수십 개 악기가 각자 내는 소리와는 표현의 폭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음역이 넓고 곡에 따라 음색과 창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가수가 있다고 하자. 팔색조 매력이 특징이라고 할지언정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톤과 분위기는 어느 곡을 부르든 살며시 묻어 나온다. 게다가 그것이 듣는 사람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음악적 콘셉트를 바꾼다 한들 그 차이가 와닿지 않을 것이다. 파이프오르간이 왠지 그런 느낌이다.


올리비에 라트리 공연 당일 롯데콘서트홀 로비


1부 프로그램 중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는 유독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이었다. 어렸을 적 보았던 어느 만화영화에서 분명히 들어본 기억이 있다. 비밀의 문을 지나면 보석으로 뒤덮인 정원이 펼쳐지는 장면이었는데 그런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연주였다. 인터미션 후 연주된 비도르의 오르간 심포니 5번은 오르간의 매력을 한껏 뽐냈다. 다섯 악장 각자의 특색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음색을 조합하였다.


오늘 공연 프로그램을 다른 누군가 제2의 장소에서 선보였다면 리뷰는 저정도 분량으로 끝났을 수도 있다. 파이프오르간이라는 악기의 특징과 함께 리사이틀 공연의 한계라고 느끼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달라질 게 더 없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새로운 게 나왔다. 세심한 공연 기획과 그것을 실현시키는 연주자의 역량으로 말이다.


첫 번째 세심 기획은 오르간 각도 조정이다. 오르간 콘솔을 1부에선 왼편, 2부에선 오른편으로 틀었다. 무대 우측(상수) 객석에서 관람하느라 연주자의 손을 볼 수 없었는데 2부에선 볼 수 있었다. 좌석 등급에 따라 시야가 고정되는 불문율을 깬 것이었다. 공연날 사소한 것에도 예민할 수밖에 없는 무대 위 연주자 입장에선 이러한 변화가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할 수 있었던 건 연주자의 집중력이 남다르다는 반증일 것이다.


게다가 인터미션에는 오르간 콘솔을 파이프와 수직선상에 위치시켰다. 인증사진을 찍으려는 관객들을 위해 오르간 콘솔과 파이프가 한 그림에 담길 수 있도록 조정한 것이다. ‘왜 인터미션이 20분이나 되지?’라고 생각했던 의문이 풀린 순간이었다. 2부 시작 5분을 남기고 사진 촬영을 통제한 후 각도를 조정하더라.


1부 무대배치(좌측)과 인터미션(중앙) 그리고 2부 무대배치(우측)


두 번째 세심 기획은 관객의 앙코르곡 신청이다. 공연 전 로비에서 듣고 싶은 앙코르곡 신청을 받고 있었다. 보통은 희망하는 곡명을 작성하게끔 하는데 오선지와 연필이 비치되어 있더라? 앞서 관객들이 작성한 앙코르 요청지를 자세히 보니 어느 가요의 단선 멜로디가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는 악보의 1면 인쇄물을 부착한 사람도 있었다.


희망하는 앙코르곡을 신청할 수 있는 게시판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앙코르의 시간. 무대로 앙코르 요청지가 부착된 게시판이 들어왔다. 꽤 오랫동안 고심하는 모습에 '이거 정말 즉흥이구나'라고 느꼈다.


그리고 뽑아 든 종이 두 장. 첫 번째 종이를 앞에 두고 처음 보는 노래인 듯 오른손으로 멜로디를 연주한다. 나조차도 후렴구만 알고 있던 <블랙핑크 지수의 꽃>이었다. 뒤이어 연주한 곡은 5월에 자주 들리는 <어머니 은혜>였다. 단선율로 연주하고 마치길래 아무래도 모르는 곡일테니 양손연주는 어렵겠단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양손으로 어드벤처 영화 OST 느낌의 화려한 곡을 연주하길래 '앙코르 레퍼토리 중 하나인가 보다'하고 듣고 있었다. 그런데 연주 중간에 앞에서 연주한 두 곡의 멜로디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었는데 멜로디가 곡에 녹아들면서 5분여간 즉흥연주를 선보였다. 올리비에 라트리만이 선보일 수 있는 앙코르가 아니었을까?  


앙코르 곡에 선정되려면 오선지 악보에 멜로디를 그리시면 됩니다!


열화와 같은 박수갈채에 화답하며 연주한 두 번째 앙코르는 <리스트의 사랑의 꿈>이었다. 여러 버전의 연주곡을 들었다만 오르간 특유의의 음색이 화자의 절절하면서도 담담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파이프오르간의 한계점라고 생각했던 그 지점이 새로운 파이프오르간의 세계로 향하는 시작점이었다.


박수갈채 받는 오늘의 연주자 (With 신경 쓰이는 안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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