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 세종대극장
3,022석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다. 분명 빈자리인데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간 무리 중 하나였던 내가 입장이 바뀌어 무리의 시선을 받아보니 (정확히는 그런 상상을 해보니) 체질이 무대가 아니면 쉽지 않겠다 싶었다. 저녁 8시, 공연이 시작되는 이 시간. 나는 객석이 아닌 스테이지 위에 있었다.
공연명: 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
일시장소: 2026.1.26.(월) 20시 세종대극장
기획의도: 객석에 앉아 바라보기만 했던 곳, 무대. 비밀스러운 공간의 주인공으로 초대 화려한 막이 내리고 적막이 찾아온 무대. 그 고요한 틈에서 오직 당신만을 위한 시간이 흐른다. 2026 세종시즌 공연에 담긴 음악을 미리 담으며, 공연이 건네는 영감과 질문을 보다 감각적인 방식으로 만나본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요상한 기획을 하나 했다. 2026 시즌 라인업을 소개하는 콘텐츠인가 싶어 클릭해 보니 주요 레퍼토리를 들려준다고 한다. 음감회 같은 건가 살펴보니 백스테이지 투어의 형태를 취했다. 일반적인 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 찰나에 눈에 들어온 공연명은 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 혼란에 빠져 스크롤을 내려보니 곡과 시집을 큐레이션을 했단다. 그것도 27개씩이나. 한 가지로 정의할 수 없는 메타몽 같은 기획에 티켓 가는 3만 원. (이게 맞나? 맞을까?) 모르겠으니 일단 맛이나 보자
그간 대극장 출입 시엔 사용해 본 적 없는 통로가 열렸다. 무대감독이 실시간 공연장 상황을 모니터링하는 SM 데스크를 지나쳤고, 무대엔 철제 선반 위에 시집들, 합창단 라이저 위에 수십 개의 방석이 펼쳐 있었다.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둘러보았다. 철제 선반마다 디퓨저가 놓여 있는데 편백나무와 사이프러스 어느 사이의 향이 풍겼다. 공연장과는 연상되지 않는 향과 이색 체험이 한 데 묶여 있으니 특별한 경험으로 인식되는 느낌이었다.
어느덧 정각 8시. 공연장 안내멘트가 나왔다. 평소와는 다른 차분한 목소리의 남성이 전하는 오늘 프로그램에 대한 안내와 유의사항. 총 7개의 음원이 재생되는 동안 무대 중앙에 비치된 시집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시집이 있는지 살펴볼까?' 몇 권 들춰보다 그냥 자리로 돌아갔다. 흘러나오는 노래와 큐레이션 된 시를 찾으려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미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집중하기로 했다.
1962년 발매된 부슈 콰르넷(Busch Quartet)의 앨범 중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현악사중주 작품번호 14번 ‘죽음과 소녀’ 2악장이 재생되었다. 소리의 질감이 투박하고 잡음이 배경음악처럼 흐르는 게 60년 세월의 차이를 대변하는 듯했다. 서울시발레단 창단 2주년 공연 더블빌 <죽음의 소녀> 작품과 연관된 곡이라는데 문득 어느 예배당에서 이제 막 장례를 치른 어느 소녀가 사람이 빠져나가고 정적만 남은 자리에 혼자 남겨진 모습이 연상되었다. 음악이나 발레의 스토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황이니 줄거리 확인이 필요하겠다만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어 재생된 곡은 일레인 하겐버그(Elain Hagenberg) 작곡의 Illuminare 중 2악장 Caritas였다. 합창곡이었는데 서울시합창단 <언제라도, 봄>이란 공연명처럼 반갑게 들려왔다. 스트링과 하모니, 누가 주 선율이라 할 것 없이 밀어주고 끌어주는 밸런스가 인상적이었다. 3월에 열리는 이 공연을 보러 가면 포근하고 편안할 것만 같아 날짜를 한번 더 확인했다. 마침 해당 곡이 국내 초연된다고 하니 봐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되었다.
어느 때보다 음악에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시집을 읽지 않기로 한 결정에서 시작되었다만, 그만큼 환경이 잘 조성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먼저, 스피커 배치가 눈에 띄었다. 앉아 있는 자리 기준으로 정면과 좌우 측에 스피커, 그리고 조명을 다는 천정 배턴에도 스피커가 여럿 달려 있었다. 앉아 있던 위치가 중앙에서 상수 쪽으로 치우쳐져 있음에도 균일하고 공간감 있는 청음이 가능했다. 배부된 프로그램북 마지막 페이지 제작 크레딧을 읽어 보니 2개 음향 업체와 협력했더라. 무대 조명도 몰입에 한몫했다. 노랑&초록, 노랑&파랑 등 강렬하진 않지만 멜로디에 묻어나는 컬러감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장시간 앉아 몰입하기엔 등받이 없는 자리가 매우 불편했다. 방석이 아닌 빈백이나 캠핑 의자가 시집 주변에 깔려있다면 어땠을까? 누워서 때론 앉아서 본인에게 가장 몰입이 잘되는 자세로 이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플레이리스트가 7부 능선을 넘은 시점에서 무대가 어두워졌다. 무대 중앙에 의자 3개가 세팅되었고 서울시오페라단 시즌 무용수 이지영과 큐레이션 된 시의 저자 한여진, 그리고 이단비 드라마투르그의 대담이 시작됐다. 객석을 등지고 무대 위에 올라선 세 사람을 바라보는 이 시야가 낯선 듯 낯익었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공연 홍보 인터뷰 영상 구도였다.
30여 분간 진행된 아트 다이얼로그 중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장면이 있다. 첫째는, 한여진 시인의 시 낭송이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시를 배울 때 운율이란 용어가 매번 등장했는데 내겐 아리송한 개념이었다. 그런데 비로소 오늘, 시 속 운율이 무엇인지 깨달아버렸다. 시 구절에 리듬이 있고 음가가 있었다. 한여진 시인 특유의 문장 끝처리가 몰입감을 더한다. 마치, 곡의 특성을 제일 잘 아는 작곡가가 직접 연주하는 느낌이랄까.
학창 시절 연극 동아리 활동을 하고 현재는 건축가로 일하고 있다는 시인의 이력도 흥미로웠다. 공간 디자이너로 근무하다 보니 "남들이 알지 못하는 완성된 공간 이전의 공간을 보게 되는데 그곳에서 느끼는 것들이 있다"라고 영감의 원천을 소개했다. (상사에게 불편한 말을 듣는 순간에도 글감이 떠오른다는 언급했는데 그녀의 직장생활을 위해 비밀로 부쳐두자)
세종 인스피레이션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 공연DX팀은 새로운 영감을 제시하는 프로그램을 지속해서 선보인다고 한다. 극장 곳곳을 이동하며 감상하는 '워크 어바웃 콘서트', 루프톱 투어 '광화문 월야선유도', 무대 위에 누워 발레 음악을 체험하는 '리스닝 스테이지'가 올해 연이어 선보인다 하니 그땐 이번보단 덜 고민하고 예매하지 않을까 싶다. (나, 걸려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