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ination and Reality> 동대문DDP 디자인 전시관
오랜만에 동대문에 왔다.
"언제 볼까요?"
몇 주간 진심 반, 인사치레 반으로 오고 가다 드디어 날을 잡은 것이다. 사실 약속 날짜는 잡은 건 나지만, 만남을 주선한 건 상대방이었다. 친분은 물론 안면도 없는 스페인 사람이었지만 만남을 결심한 건 그가 보낸
초대장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낯선 이와 점심 식사를 같이 하기엔 소화도 안될 터, 늦은 점심으로 약속 시간을 잡았다.
그러고 보니 이곳 동대문에서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던 필리핀 친구의 한국 방문 때도, 스페인어를 배우기 위해 칠레 선생님과 과외를 한 장소도 동대문 DDP 근방이었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건축물의 신선함을 자랑하고 싶은 자국인의 자부심에 이방인들을 이곳으로 불렀었나 보다.
만나기로 한 이 사람, 알고 보니 유명 인사다. 평일 오후인데도 그를 만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커플 손님들이 유난히 많았다. 나도 킴벨과 왔으니 그 무리들 중 하나다.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우리 차례를 알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부분의 시간을 그는 말했고 우리는 들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태어난 마을 이야기로 시작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 파블로 피카소와의 만남, 아내 갈라로부터의 영감, 그리고 사후 이야기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처음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어투와 단호한 표정이 거슬렸다. 그랬던 내가 그의 화려한 인생 스토리와 작품을 마주하며 내적 탄성을 터트리기 시작했고, 유달리 유난한 그의 콧수염이 달라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킴벨과 오늘의 감흥을 나누었다. 나와는 달리, 킴벨은 정반대의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와 아이컨택을 멈추지 않으며 연신 고갯짓으로 호응했던 그녀였기에 나와 비슷한 걸 느끼는 줄 알았다.
“자신감과 소신으로 둘러싸인 것 같지만 속은 매우 여린 사람 같아. 어느 때는 무언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여”
“너무 많은 게 보이고, 너무 많은 게 느껴지는 사람 같아. 그 그림 보며 그 사람이 한 말 생각나지?”
그는 밀레의 <만종>을 가리키며 감자가 담긴 바구니에서 아기의 시체가 들어있는 관이 보인다고 말했다.
동일한 그림을 보고 박수근 화백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친 농촌부부가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경외감과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평화로운 마음이 느껴졌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랬어. 자기 안에 생각이 많으니 차분히 들어준다면 잠시라도 안정을 찾을 수 있겠다 싶었거든”
배려 깊은 킴벨의 남편이어서 마음속 감사 기도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