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로 물베기
Jacinto 산은 PCT를 시작하고 2주만에 만나는 사막의 첫 침엽수림 산이었다. 커다란 나무 숲 아래 나무 그림자를 따라 걸으니 그 선선함과 상쾌함이 좋았다. 그래도 산은 산인지라 오르막을 오르는게 힘들었다. 나는 오르막에 강한 편이고, 은진이는 내리막에 강한 편이었다. 먼저 정상에 올라 기다리고 있으면 10분, 20분이 지나서 은진이가 뒤에서 천천히 걸어 올라왔다. 그리고 쉬다가 내가 먼저 출발해도 내리막에서는 은진이가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갔다.
‘이제 4,000km 조금 안 남았네.’
드디어 300km 구간을 지났다. PCT에서는 특정 거리마다 하이커들이 돌로, 솔방울로, 나뭇가지로 숫자를 만들어 놓았다. 이럴 때면 으레 남은 거리에 대한 계산이 앞섰다. 이때까지 해온 걸 떠올려 보면 남은 날들이 까마득해 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무로 빽빽했던 산을 벗어나 어느새 나무들이 띄엄띄엄 나타나기 시작했다. 짧았던 산림욕은 끝이 나고 다시 사막이었다. 태양이 머리 위에서 내리 쬐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반가웠다. 사막이 시작 되기 전 뒤돌아 본 산의 전경은 양떼를 줄지어 놓은 듯한 고적운과 조화를 이뤄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진아, 내 사진 좀 찍어주면 안되나?”
“어.”
못마땅한 얼굴로 은진이가 대답했다.
“진아 사진 자주 찍어달라는 것도 아닌데 좀 찍어주면 안되나?”
“찍어주잖아.”
“아니 꼭 그렇게 인상 쓰면서 그래야 하나?”
“오빠 사실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데 꼭 지금이어야 하나?”
“아니 그러면 힘들어서 나중에 찍어준다고 말하면 되지 그렇게 인상만 쓰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아는데?”
“그래. 찍어 준다잖아!”
“됐다. 알았다. 미안하다. 앞으로 찍어달라고 안 할게.”
은진이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정상에 오른 지 얼마지 않았지만 배낭을 다시 매고 길을 나섰다.
긴 오르막을 올랐던 덕분에 내리막을 조금씩 조금씩 산을 둘러 내려갔다. 그렇게 마을에서 원없이 마시고 먹었음에도 길 위에 오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배가 고팠고, 탄산이 그리워졌다. 산을 내려가며 이틀 전 먹었던 고기들과 탄산을 생각하니 이내 문명이 그리워졌다. 내리막에 강한 은진이는 어느새 나를 따라잡았고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앞질러 갔다.
‘와.. 진짜 못됐네.’
싸웠으니 은진이의 행동이 이해됐지만 동시에 미운 마음이 들었다. 해는 어느새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뒤에서 비치는 해가 만들어 내는 그림자가 내 길 안내자가 되어 있었다. 그림자를 유심히 바라보니 벙거지 모자에 배낭 옆에 꽂은 매트, 배낭 위에 얹은 텐트가 삐져 나온 모습이 보였다.
‘난. 참 운 좋은 삶을 사는구나.’
갑자기 가슴이 벅차 오르기 시작했다. 배낭을 내리고 길가에 잠시 앉았다. 휴대폰을 꺼내 셀카를 찍으려고 얼굴을 보니 얼굴에는 땀과 흙이 만나 구정물이 굳어 있고 깎지 않아 듬성듬성 자란 수염에 새카맣게 탄 얼굴이었지만 낭만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에 취해있는 것도 잠시 저물어가는 해에 다시 몸을 움직였다. 저 멀리 보이는 내리막의 끝에는 은진이가 보였다. 내리막의 끝에 도착했을 때 은진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오빠, 오빠 우리 5km만 더 가면 트레일 매직 있는 거 같아.”
은진이가 기쁜 소식을 전했다.
“진짜가?”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이미 해는 넘어가고 있었고 하루 종일 걸은 걸음은 우리를 어제보다 북쪽으로 29km를 올려 놓았다. 이미 힘이 빠질 대로 빠져 5km를 더 걷는다는 건 무리라고 생각이 됐지만 탄산음료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 해보자. 오늘 드디어 30km 넘게 걸어보자.”
2주간 한번도 하루에 30km를 넘게 걷지 못했다. 그 동안 만났던 하이커 중에 어떤 이는 하루에 40마일, 60km를 넘게 걷는다고도 했고, 타는듯한 목마름의 날에 만났던 잭과 새라는 하루에 평균적으로 40km를 걷는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다리도 어느새 많이 좋아졌고, 짐도 꽤 많이 숙모에게 보냈고, 하루쯤은 무리해서 기록을 세워보고도 싶었다. 아스팔트 길이 한참 이어졌다. 흙, 모래 길만 걷다 오랜만에 포장도로를 걸으니 어색했다. 그 길이 끝나자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길이 시작되었다. 발이 빠진 만큼이나 발을 다시 들어올려 걷는게 힘에 부쳤다. 해는 이미 저 멀리 산 뒤로 숨어버려 멀리 보이는 불빛을 등대 삼아 걸었다. 마지막 2km, 그대로 뻗어 버리고 싶었다. 30분 뒤에 마실 탄산음료를 생각하며 한번 더 마음을 다잡았다.
‘혹시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으면 어떻하지?’
불현듯 도착했을 때 트레일 매직이 끝났으면 내 마음을 어떻게 다잡고, 은진이의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나 걱정이 되었다. 앞서가는 은진이를 보며 열심히 걸었다. 그리고 저 멀리 모래길이 끝나는 곳에 굴다리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가까워 보였다. 도착했을 때 이미 은진이는 나보다 앞서 도착해 있었다.
“오빠 대박! 맥주가 딱 두 캔만 남았더라.”
은진이는 맥주 두 캔을 들고서는 기뻐했다. 맥주를 보는 순간 힘들었던 몸과 마음도 한꺼번에 녹아 내리는듯 했다. 힘없는 미소가 얼굴로 올라왔다. 맥주를 받아 들고 배낭을 내던지고 아이스 박스가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주변에 있던 하이커가 소리쳤다.
“행복한 시간 즐기세요!”
그랬다. 행복의 순간이었다. 아이스 박스에는 얼음과 음료수가 가득했다. 그리고 아이스 박스 옆 하이커 박스에는 과자, 파이, 바나나도 있었다. 은진이와 건배를 하고는 텐트를 쳤다.
고속도로가 아래의 굴다리라 차가 지날 때마다 큰 소리가 났지만 아무렴 좋았다. 그간 트레일 매직을 몇 번이나 만났다. 굴다리 밑 이곳은 일회성 이라기보다는 정기적으로 매직을 가져다 놓는 걸로 보였다.
미국을 오기 전에는 미국인과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었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편견으로 미국인들은 거만할 것이다, 인종차별이 심할 것이다, 예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미국에 와서는 정말 많은 도움을 받고, 얘기를 나눌 때도 그들이 예의 바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사람에 대한 배려도 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을, 도시의 미국인들을 겪어보지 못했지만 최소한 좋지 않은 편견은 없앨 수 있었다. 아니 미국인들이 좋았다. 편견이라는 것이 어쩌면 부족한 경험이나 지식에 바탕을 둔 무지한 판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후에도 도착한 하이커들이 아이스 박스를 열어보며 기쁨의 소리를 치는걸 몇 번이나 더 듣고야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