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outh California - 12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

by 빵호빵호


“아 뭔데!”

400km 지점 근처에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Guthook 앱을 보니 마을 사람들이 400키로를 기념해서 트레일 매직을 가져다 놓은 경우가 있다고 했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트레일 매직이었지만 이런 경우는 무조건 있다고 믿고 봤다. 없으면 실망이 컸지만 있다고 믿는 것이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탄산 음료를 먹을 생각에 들떠 쉬는 시간도 줄여서 하루 종일 걸음을 재촉했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갈 때쯤 도착했을 때는 텐트 사이트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아….’

갑자기 온 몸에 힘이 빠졌다. 없을 걸 알면서도 주변을 돌아다니며 재차 확인했다. 무언가라도 나타나길 바랬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20분동안 힘만 뺐다.

‘아니 400km 지점에 아무 것도 안 가져다 놓을 수가 있어?’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원망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마음 정리가 되지 않았다. 호의를 권리라 여긴 머리 검은 짐승이었다.


다음 날 은진이가 먼저 가고 아직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계속 길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면서 걸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길 옆 구석진 곳에 파란 아이스 박스가 있었고 그 위에 ‘PCT 하이커들을 위하여’ 라고 적힌 쪽지가 있었다. 배낭을 옆에 던지고 박스를 열자 맥주와 탄산 그리고 과일, 빵, 과자가 가득 들어있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새것이었다. 은진이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 먼저 지나간 하이커들도 그냥 지나쳤을 것 같았다.


작은 박스안에 엄청난 음식들이 들어있었다


“은진아!!!! 빨리 여기 온나!!”

앞서가는 은진이를 돌려세웠다..

“와 오빠 엄청나네.”

은진이도 박스 안을 보더니 배낭을 바로 던지고 길가에 앉았다. 시간은 점점 여름을 향해 갔기에 이글이글 끓어 오르는 태양 빛 아래서 마시는 맥주는 그지없이 시원했다.

“진아 신기하지 않나? 원래 트레일 매직 없으면 없는구나 조금 섭섭하고 마는데 어제는 이상하게 포기 못할 정도로 섭섭하더라고. 근데 오늘 이렇게 또 선물이 있네.”

“오빠, 조용하고 그냥 즐겨.”

은진이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나도 따라 맥주를 입 안으로 쏟아 부었다. 행복의 순간을 만끽하고 박스를 조금 더 잘 보이는 곳에 옮겨 두고 길을 나섰다.


Deep Creek을 끼고 걸었던 구간


커다란 계곡의 강줄기 Deep Creek를 아래쪽에 두고 산 허리의 길을 따라 걸었다. 사막에서는 흔치 않는 일이지만 물줄기를 옆에 두고 걸으면 여차하면 언제든 물을 뜨러 내려가면 됐기에 마음이 푸근해서 좋았다.

‘Welcome PCT Hikers, Deep Creek Hot Springs!’

앱을 통해서 미리 알고 있었지만 ‘사막에 온천이 있다고?’ 하며 어제 기대 반, 의심 반이었는데 온천 표지판에 도착하니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많은 것이 보였다.

“진아, 얼른 가보자.”

“응.”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눈을 의심하는 광경이 펼쳐졌다. 사람들이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아저씨 자연인의 상태로 무언가를 덜렁거리며 쓰레기를 줍고 있었다. ‘역시 미국이구나…’자유, 타인을 의식하지 않음, 개인 주의가 만드는 질서, 머리 속에는 내가 가진 미국에 대한 자유분방함의 이미지의 단어가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말 그대로 나체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의식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대놓고 쳐다볼 수는 없었지만 곁눈질로 자꾸만 평소에는 쉽게 볼 수 없는 타인의 특정 부위로만 자꾸 시선이 갔다.



“오빠!! 그만!!”

“응. 그래…”

은진이의 경고에 정신을 차리고 그늘을 찾아 배낭을 내리고 매트를 깔고는 바로 강으로 향했다. 신발과 양말까지 벗은 뒤 발을 담그자 세외도원이 따로 없었다.

“진아 진짜 시원하네. 니도 얼른 담궈봐라.”

“응. 안 차갑나?”

“차갑지. 근데 너무 좋다.”

은진이도 처음에는 차가워 하더니 이내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20kg의 배낭 무게가 하루에도 10시간이 넘게 발에 쏠리다 보니 발은 항상 붓기를 달고 다녀야 했다. 물이 귀한 사막이라 마을과 마을 사이 발 한번 못 씻는 경우도 많았는데 냉찜질을 해주니 쌓인 피로가 모두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딥 크리크의 물줄기는 어디서부터 나오는지는 몰랐지만 사막과 어울리지 않게 강력했고 끊임이 없었다. 그래서 물줄기 근처에는 큰 나무들도 많았고 사람들이 휴양을 올 수도 있었다. 딥 크리크의 물줄기는 차가웠지만 한쪽에 사람들이 모인 곳을 가보니 큰 돌들로 탕을 만들어 놨는데 강줄기와는 다른 곳에서 따뜻한 물이 나오는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와 진짜 따뜻하다 진아.”

“오빠 들어가 볼래?”

“아니, 그냥 한숨 자고 싶다.”

“그래. 점심 먹고 한숨 자고 출발하자.”

점심을 먹을 때도 나체의 사람들은 자꾸 여기 저기 돌아다니면서 시선을 빼앗아갔다. 처음보다는 덜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을 일이라 생각됐는데 이곳에서는 이렇게 자연스럽다는 것이 문화의 차이가 이렇게 크다는 것이 신기했다. 점심을 먹고 노곤함에 스르르 잠이 들었는데 얼마 자지 않은 것 같은데 은진이가 출발하자며 흔들며 깨웠다.

“아.. 조금만 더….”

“오빠씨, 얼른 가셔야지요!!”

‘걷기 싫어하는 애가 웬일일까?’

몽롱한 정신을 다잡고 몸을 일으켜 펼쳐놓은 짐들을 챙겼다. 해는 머리 바로 위에 떠올랐을 때인 12시보다 2~3시간 정도 땅을 데우고 나면 몸이 느끼는 열기는 더 강했다. 온천으로 들어오기 전보다 낮잠을 잔 이후의 사막이 더욱 뜨겁게 느껴졌다. 한동안 계속 이어지는 딥 크리크의 물줄기와도 작별하고 다시 사막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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