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아파트 현관에서 쿠팡 트럭이 혼자 공회전 중이다.
짐칸 속 환하게 밝혀진 내부에는 아직도 배송되지 않은 주문들이 엿 보인다. 곧 짐 두 개를 들고 뛰어가는 젊은 기사가 보인다. 밤 11시. 그 시간에도 뛰어야 하는 그의 파란 조끼를 본다.
'클릭 한 번이면 집 앞까지 배송해 드립니다.'
'이젠 새벽 배송, 내일 아침 문 앞에서 만나요'
그런 광고들이 그의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들리는 듯하다.
노동자가 아니고 자영업자가 되어버린 그들은, 핸드폰이 지시하는 곳으로 밤낮 없이 뛰어다닌다. 택배 기사의 과로사와 도로 위에서 곡예를 하다 튕겨져 나간 젊은 배달의 기수들이 뉴스에 나온다. 그 일을 주문한 사람의 액정 속 뉴스의 이미지와 모바일 어플의 이미지는 연결이 얕다. 타인의 수고로움과 위험, 나의 편의 사이에 실감은 없다. 마치 모바일 속 게임처럼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갈 수록 실감이 없다.
그나마 전화를 걸어 주문하던 몇년 전에는 길에서 누군가 나자빠졌을 때, 그를 고용했을 식당 주인이 어떻게든 뒷감당을 했을 터이다. 인건비를 건별 몇 백 원의 무수한 알고리즘으로 쪼개버린 이후의 노동에서 뒷감당은 기사 자신의 몫이 되어버렸다. 넘어져도 '씨바 졸라 아파'하며 스스로 수습하고 병원에 가야 한다.
플랫폼적인 사고는 늘 현실을 혁신한다고 한다지만, 영민하게 계산한 그 비용에는 타인의 수고가 건별로 쪼개진다. 인건비와 리스크를 분산시킨 영특한 머리로 만든 플랫폼 서비스가 우리의 미래 산업이다. 마케팅과 이미지는 '자, 이 편리함을 떠먹지 않겠어?' 하며 매일 납득시키는 중이다.
2000년대 초반 판도라TV가 동영상 앞에 광고를 달겠다고 했을 때 '미친 짓'이라 했다. 그건 보편적으로 불쾌한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15분 남짓 한 유튜브 영상에 광고가 두 개는 붙는다. 기껏해야 음식을 배달하는 일을 사회 혁신이라 받아들여야 하는 사회는 무엇이 진보한 것일까. 주문을 마치고 돌아갈 곳이 사라진 기사가, 공원 화장실에 오토바이를 대야 하는 상황과, 노상의 만두 가게 앞에 오토바이를 대고 자신의 끼니는 밀어 넣어야 하는 상황은 정말 혁신적인 일인가.
N 잡러이니, 프리랜 서니 하지만 그들이 수행하는 이 쪼개진 노동은,
외주의 위험을 함께 책임지지 않는 기민한 착취와 기민한 계산 위에서 벌어진다.
전태일 50주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칠 대상이 사라져 버린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