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산소는 논과 포도밭이 앞에 펼쳐진 볕이 잘 드는 자리이다. 15년 전 원래 있던 산소 자리도 양지바른 작은 언덕 위였지만, 큰 도로를 낸다는 바람에 공들여 이장하였다. 이런 시골에 그렇게 큰 도로가 왜 필요한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도로가 꾸역꾸역 뚫리고 나서 내가 알던 발안과 향남의 농촌은 사라졌다. 개발은 착실하게 풍경을 잡아먹었다.
이장한 산소 주변에 공장이 들어온다는 말이 들렸다. 산소자리를 팔라는 업자와 주선책은 수시로 아버지에게 연락하였다. 어렵게 이장한 산소를 또 팔순 없기에 못 들은 척하는 사이, 또 논길이 먼저 아스팔트로 덮이고 공장들은 정말 하나씩 전진하듯 들어섰다. 지금은 포도밭과 산소만 섬처럼 덩그러니 남았고 모두 공장이 포위하고 있다. 또 공장이 들어오기 위해 오늘도 산을 깎는다.
벌초를 하고 땀을 식히며 보던 풍경 속에는 벼로 우거진 논과, 친척 어른들이 학교에 가기 위해 수시로 걸어 넘어갔다던 얕은 산들이 있었다. 이제는 공장과 컨테이너뿐이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산자락 끝에 아파트와 공장, 그리고 또 무언가를 짓는 크레인이 프레임에 걸린다. 화성은 나의 조부모와 부모에게 고향이지만 나에게는 눈 둘 곳이 마땅치 않은 도시이다.
부모의 얼굴을 보러 병점에, 혹은 명절에 시골집이 있는 향남에 잠시 내려가고 서둘러 나의 서울 집으로 빠져나왔다. 서울의 내 집은 형편없이 작았지만, 쾌적한 도시의 인프라와 크고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보는 것이 눈둘 곳 없는 화성의 풍경보다 좋았다.
아버지의 사고 이후부터 더 이상 화성에서 서둘러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다. 사고를 수습하고 엄마의 노화를 염려하며 병점에 머물게 되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정말 '어쩔 수 없어'져버렸다. 삼 년이 지나도 아는 사람은 생기지 않았다. 아니, 나의 일과 작업은 방 한 칸에서 해결되는 스케일이라 아는 사람이 없다고 불편하지 않았다. 코로나로 화상 속 만남이 보편적 문화로 바뀌면서 편한 면도 없지 않았다.
서울로 빠져나가기 바쁘던 병점역 앞에 청년지원센터가 생긴다고 하였다. 전에 알던 솔가를 통해 처음 소식을 접했고, 솔가는 그곳에서 일하며 도시학교를 기획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런 풍경에서 무슨 도시에 대해 생각하나?' 속으로 그런 생각을 희미하게 띈 채 그의 말을 낯설게 들었다. 문화기획자 도빈이 결합하고 점점 이야기는 구체적이 되어갔다. 몇 번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인데 나도 어찌어찌 같이 하고 있었다.
1)인문학, 2)지역여행, 3)기획을 배치하여 화성의 멋진 청년을 만나보자던 야심찬(?) 계획과 별개로 코로나 4단계의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다. 6주의 인문학 강의가 지나갔지만 관계가 생기기엔 역부족인지라, 여행만은 어떻게든 가보자고 작전을 짰다. 하여 화성의 <소다미술관>과 <페어라이프센터>에 소그룹으로 조심스레 접속하였다. 두 공간 모두 아파트 숲에 섬처럼 떠있어 보였다. 하지만 공간에 한 발 들어선 순간부터 그곳에 쌓인 시간들이 빛을 내주었다.
바깥의 삭막함과는 다른 기운이 흘렀다. 여러 해 동안 콘크리트에 착생한 식물이 어느새 어엿한 존재감을 갖듯이, 그 공간은 자신의 힘으로 아름답게 뿌리내리며 존재하고 있었다. 공간의 처음을 사진과 슬라이드로 들려주던 이야기에는 모두 '어쩔 수 없이' 내려온 각자의 막연함과 막막함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발을 내디뎠고 그곳에 함께 뜻을 이어가는 사람들과 지금에 닿아있다. 그 아래에 담겨있던 묵직한 믿음은 내가 가늠할 수 없는 희망으로 읽혔다. 신도시에서 예술로 빛을 비추겠다는 미술관의 믿음과 마을을 일궈보자는 교회의 믿음은, 쉽게 판단하는 나의 이성에 퉁하며 파문을 남겼다.
화성 곳곳에서 온 참여자들의 마음에도 조금은 놀라운 발견이지 않았을까. 동네의 누군가와 편하게 어울려 본적 없는 이들은, 아름다운 두 공간에 잠시 둘러앉아 하고 싶은 것을 말해보았다. 하나같이 ‘모임’을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 엄마는 공원만 나가도 친구를 사귀고 오는데, 우리 세대는 사람 만나는 것도 기획을 해야 하니… 한참 서툴지 않나 싶다.
뭔가 '딴짓을 해보세요'하고 부추기는 것이 이 학교의 숨은 의도인데, 두 공간은 '풍경 탓만 할 순 없잖아요. 다른 삶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너그러운 톤으로 말을 건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