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우영 Sep 26. 2024

작가의 등 <룩백>


작가의 작업하는 모습은 책상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영화나 오디션 프로의 소재로는 매력이 없다. 찍어봐야 책상에 앉아있는 모습이 전부이니까. 과정에 담을 이미지가 도통 나오지 않는다. 요리와 음악은 그런 면에서 분량을 뽑기 좋아서 계속 카메라가 쫓기에 좋은 소재이다. 흑백요리사는 그래서 재미있다. 


여기 가만히 분투하는 등에 많은 컷을 할애한 만화가 있다. 룩백. 140페이지의 단편만화 한 권이 57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극장에 상영 중이다. 원작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기면 연출이 많아지고 화려해지지만, 그것이 더 '좋은 방식'으로 되는 경우는 드물다. 만화는 컷에서 다음컷으로 옮기며 '공백'을 남긴다. 그 사이를 독자가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빠르게 몰입하며 따라가는 효율적인 매체이다. 


이 사이를 영상화하면서 채워 넣게 되는데, 더 많은 이미지와 사운드가 들어서기 때문에 자극이 높아지고 또 다른 연출이 도입된다. 이 과정이 '사족'이 될 확률이 높다. 만화에서 재단한 컷은 세로인 경우도 있는데, 극장이나 모니터에 상영하려면 가로가 긴 16:9의 고정 프레임으로 풀어내야 한다. 컷으로 넘기며 '생략'되었거나 프레임 자체를 잘라서 '생략'했던 모든 가능성을 재해석해서 그려 넣는다. 그러면서 다시 원작의 컷으로 잘 돌아와야 원작이 가졌던 고유한 '인상'을 유지하면서 작품을 운영할 수 있다. TV판은 광고를 붙여야 해서, 극장판은 한 시간 반 정도의 분량을 제공해야 티켓값을 지불하기에, 애니메이션은 태생적으로 많은 '사족'을 품게 된다. 원작 만화책으로 감상했던 인상이 더 좋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화제작으로 불렸던 슬램덩크 극장판조차 산왕전 다섯 권의 긴장감을 따라가지 못한다. 


룩백은 그런 면에서 매우 잘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단편만화의 효율적인 컷과 분량 안에서 섬세하게 그려낸 감정선을 잃지 않고 57분을 완주한다. '스토리를 잘 쓰는 후지노와, 그림을 잘 그리는 코모토가 서로 만화로 만나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요약하기에는 미안할 정도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녹아있다. 그것은 원작의 여백을 더 풍성하게 전달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음악과 풍경묘사가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답다. 




나에게 닿는 큰 감정선 하나는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후지노가 처음 은둔형 외톨이의 코모토의 그림을 보고 충격에 빠지는 순간. 논두렁에서 분한 마음으로 달려가서 1-2년간 나름의 수련(?)을 하는 과정. 코모토가 도서관에서 '배경미술의 세계'란 책을 펼쳐 들고 술렁이는 마음으로 미대 입시를 결심하는 과정.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은 때로는 열등감과 혼자 하는 분투와 좌절로 뒤섞인다.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이 조용한 바람은 소중하고, 밖으로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그 마음을 왈칵 내비치는 감정은 울림이 있다.




두 번째는 '방에서 나오길 잘했어'

코모토는 사람이 무서워서 학교에 등교하지 못했다. 그의 은둔은 후지노라는 동급생의 만화에 배경을 그리면서 밖으로 나오게 된다. 앞서가는 후지노의 손에 이끌려 그녀의 등을 보며 함께 세상을 보고 그것을 작품으로 그려나간다. 방문을 열고 세상에 나오고 우정을 믿고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고 싶어 하는 바람에 이르기까지. 더듬거리는 말 너머의 용기를 알기에, 또 그것은 이내 부서지기에.  


책상에서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일들은 대체로 '더디다'. 

하고 있는 자신도 변화나 성취를 체감하는 날들보다, 번번이 현타가 와서 '이게 다무슨 소용이람' 체념하듯 돌부리에 쉬이 넘어진다. 그러면서도 책상을 떠나지 못한다. 매일의 숙제처럼. 만화는 가만히 앉은'등'을 비추는데 카메라를 할애한다. 가만한 등과 엉덩이로 지켜낸 시간과 계절을 묘사하면서, 내면에 피어나는 온갖 감정들을 이야기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작업하는 자에게 이만큼의 헌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시작부터 끝까지 아름답고, 재미있다. 


'작업하는 거 하나도 재미없어..'

'그런데, 너는 왜 계속 작업을 하고 있어?'


룩백은 책상에서 뭉툭해지고 닳고 닳아서 잘 보이지 않는 답을 전해온다. 

닿지 못한 곳에 닿으려는 마음으로 도전하는 사람의 등을 응원하는 만화이다.

한 번씩 꺼내보게 될 수작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FbZd4FeNcLU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