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우파 vs. 정치우파, 경제우파가 이겼다
이번 프랑스 대선은 여러모로 재밌다. 길게는 백 년 가까이 되는 유럽의 기존 정당 사이에서 의석도 없는 신생 정당의 대표, 거기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뉴스에 등장한 적이 없는, 지금도 마크롱인지 마카롱인지 헷갈리는 젊은 정치인이 프랑스 대통령이 됐다. 너도 나도 자신이 한국의 마크롱이 되겠다고 한다. 정치 경력이 일천해도 뽑아달라는 것인지, 당원 수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인지, 친기업 노선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젊어지고 싶다는 것인지...한국의 마크롱이 되고싶다는 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경제 우파 vs. 정치 우파, 경제 우파가 이겼다"
나 같으면 제목을 이렇게 뽑았을 것이다. 마크롱은 투자은행 그것도 <화폐전쟁>에서 세계를 주무르고 있는 자본권력으로 등장하는 로스차일드 출신이다. 과거 경력도 공약도 일관성 있게 고전주의 자유무역주의, 법인세 인하, 고용 유연화 등 친기업적이다. 북유럽식 복지와 경제성장을 하겠다는 인터뷰도 있었는데 지난 스웨덴 우파 정권 시절의 스타 재무장관 안데쉬 보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들린다. 안데쉬 보리 시절 스웨덴 경제 실적은 좋았지만 이민자 등 사회 약자를 위한 복지는 크게 축소됐다. 외교적으로 보자면 자유 무역을 주장하는 사람답게 프랑스의 EU 탈퇴는 없을 것이다.
반면 극우주의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인 르 펜은 프랑스 우선, 보호무역, 유로존 탈퇴, 반이민을 주장한다. 르 펜은 정치적으로는 극우일지 몰라도 노동 규제 완화와 서민-노동자를 위한 정책을 내놨다. 마크롱 지지자는 글로벌 엘리트, 르 펜의 지지자는 노동자와 서민이라는 말이 돌았다. 마크롱의 당선은 마크롱이 좋아서라기보다 기성 권력에 대한 불신+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르펜이 되는 꼴은 보기 싫어서의 작용이 컸다고 생각한다.
난 사실 좀 혼란스러웠다.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마크롱에 대해 쏟아내는 반응, 내 머릿속에 있던 좌-우의 정책과 개념이 막 섞여서 뭐가 보수고 진보인지, 당을 무엇으로 구분해야 하는지 그 기준이 모호해지고 있다. 세상이 흑백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갑자기 총천연색이 밀려오는 느낌이다.
마크롱은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친기업 성향의 우파지만 정치 외교적으로 보자면 EU 잔류나 이민자에 대한 개방성 등을 주장해 진보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르 펜은 노골적으로 반이민 정책을 주장해와 극우로 분류되지만, 경제 공약을 두고 보자면 노동자와 약자를 위한 정책을 내놓았다. 노동자와 약자를 품는 사회 보호 정책은 소위 진보가 내 놓는 아젠다가 아니던가? 보호무역 역시, 한국에서 미국과 FTA 체결하겠다고 할 때 진보진영은 강한 반대 기류였다. 이쯤 되면 한 후보나 정당을 두고 단순히 진보-보수, 우파-좌파로 구분하기가 애매해진다. 세상은 선악의 구도로 분리할 수 없다.
선거 유세 기간 중 오바마는 공개적으로 마크롱을 지지하고 나섰다. 오바마가 왜 마크롱을 지지했을까? 이민자에 관대한 개방주의자라서? 자유무역 옹호자라서? 짦은 정치경력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나 사회적 개방성을 추구하는 면에서 오바마와 마크롱은 비슷한 면이 있다. 한편 보호무역, 반이민 등 르 펜의 공약이 트럼프와 닮은데가 많긴하다.
참, 마크롱 보다 24살 연상인 부인과의 로맨스를 중심으로 다루며 열 다섯에 선생과 제자로 만나 연인이자 동지가 된 마크롱의 순애보가 여성 유권자의 표심을 자극했다는 창의적(?!) 분석도 있었다ㅎㅎㅎ
사실 난 뉴스를 잘 안 본다. 실시간 정보나 속보는 내가 찾아보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된다. 가끔 페북의 뉴스피드만 훑어봐도 중요한 건 다 파악할수있다. 오히려 실시간으로 뉴스를 보면 관점을 놓치게 된다. 요즘 뉴스를 보면 남이 써놓은 기사나 보도자료의 복제품 정도인 경우가 많다. 뉴스가 아닌 콘텐트를 생산해야 한다. 나만해도 가치 있는 콘텐트는 돈을 주고라도 본다. 통찰력 있는 분석이나 인터뷰, 칼럼처럼 공을 들인 콘텐트는 생각할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이번 프랑스 대선과 관련해서 볼만한 기사가 있나 찾아봤는데 잘 안보이길래 끄적끄적. 유럽 정당 누가누가 오래됐나, 신당 약진 배경, 우파가 이긴 나라는 어디어디? 마크롱의 친구들, 르 펜은 왜 극우가 되었나... 등 연달아 궁금한 게 많다. 비슷한 뉴스 생산자는 널렸다. 누가 썼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그 정도 뉴스의 수준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지도 않는다. 꼭지수가 많지 않아도 볼만한 콘텐트로 가득한 뭔가 새로운 언론이 나와줬으면. 진보도 보수도 아닌 지적이고 상식적인 언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