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 대전 이후 단일 사건 최대의 인명피해, 노르웨이의 트라우마
그날의 총격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단일 사건으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은 이가 세상을 떠난 공격이었고 그날의 기억은 지금까지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겁니다. 9년 전 여름 노르웨이 정부종합청사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와 곧바로 뒤이어 우퇴이야 섬에서 일어난 총기난사사건. 두 사건으로 총 77명이 목숨을 잃었고 300명이 넘는 이가 부상을, 그중에 상당수가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중상을 입었습니다.
2011년 7월 22일 오후 3시 25분, 오슬로의 중심가를 날려버릴 듯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습니다. 총리 집무실 등이 있는 17층짜리 정부청사 유리가 전부 깨지며 날아갔고 검은 연기가 가득 퍼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거리에 쓰러져있었고 피 뭍은 구두며 옷가지, 건물의 조각, 유리와 자갈이 온 거리에 나뒹굴고 있었다. 현장에서 목격한 이들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고 증언했습니다. 폭발사고로 8명이 목숨을 잃고, 209명 부상 그중 12명 중상입니다. 근처에 있던 버스기사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참혹한 광경에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오슬로에서 폭탄이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슬로에서 35km 떨어진 북서쪽 우퇴야 섬에 한 경찰이 나타났습니다. 그날 우퇴이야 섬에서는 당시 노르웨이 집권당인 노동당의 청년 캠프가 진행 중이어서 대부분이 10대인 청소년이 600여 명가량 모여 있었습니다.
경찰은 방금 오슬로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하겠다며 섬 중앙에 캠프 참가자를 불러 모아놓고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총격은 경찰이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고, 총 69명이 사망했습니다.
사건 이후 하룻 동안 수사를 통해 그의 목적과 생각을 밝히기 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사건이 알카에다나 ISIS 같은 국제 테러조직과 연관이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노르웨이의 유색인 이민자 특히 이슬람계 이민자들은 혹시라도 어떤 공격이 있을까 봐 바깥을 나가기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당시 노르웨이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 그 역시 노동당 청년캠프 출신으로 과거 매년 우퇴야섬의 노동당 캠프에 참가했고, 캠프 기간 동안 직접 방문해 청년들과 만날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무작정 장미를 들고 거리에 나온 추모행렬을 앞에 두고 연설을 했습니다.
테러리즘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류애입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말은 요즘 한국의 정당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이 연설을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브레이비크가 아무 배경 없는 단독 범이고, 그의 목적이 다문화주의와 페미니즘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며, 이런 가치를 전파하고 펼치는 노르웨이 노동당의 정치에 제동을 걸고 그런 생각을 전하는 노동당의 미래 지도자를 없애버리기 위해 저지른 일이 것이라는 진술이 이어지자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 전체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2011년 7월 22일 우퇴야 섬의 악몽과 브레이비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팟캐스트 <그것은 알기 싫다>에서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