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돌아갈래. 힘들 때 꺼내면 위로가 되는 그때 그 장소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하던 때가 있었다. 스웨덴에 대한 글을 많이 쓰지만 아름답기로 꼽자면 다녀본 곳 중에 노르웨이에 견줄 곳이 없다. 수도인 오슬로 어느 곳에 살든 30분 반경에 숲이나 호수가 있다.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 찬기를 머금은 신선한 공기, 아침 산책을 다녀오면 이슬에 신발이 젖는다.
릴레함메르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내가 살던 곳은 기차역에서 한참 차를 타고 들어가야 나오는 작은 마을이었다. 산 아래 카페 주인이 얼마 전 곰이 나왔으니 조심하라고 할 정도로 시골이었다.
학교 뒤편에는 산이라고 부르기는 민망한, 뒷동산이라고 부르면 적당한 언덕이 하나 있었다. 숨이 가빠오기 전에 오르막이 끝나는데 릴레함메르를 감싸고 있는 산자락의 끄트머리다. 이 산의 이름이 하피엘. 노르웨이어로 피엘이 산이니 산 이름은 ‘하’, 번역하면 하산이다. 하하하 '하'가 바로 내 성씨! 아 과거 판게아 시절 일찍이 나의 조상님이 이곳에 터를 잡으시고 훗날 찾아올 후손을 위해 그 성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곳이 내 산이라고 믿고 있다. 나의 논리 정연함에 설득당한 친구들도 하산을 수정의 산이라고 불렀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에는 ‘알레멘스라텐allemansratten' 즉 사유지라 해도 누구나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명실상부한 산 주인이지만 북유럽 프로토콜에 따라 마음대로 다니게 두었다. 하지만 하피엘이 하 씨 가문의 산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한라산에 처음 갔을 때 정상에 다다르자 기대도 못한 초원이 펼쳐져 감탄했었다. 하산을 오르면 툰드라 지형의 이름 모를 야생 관목과 나무가 반겨준다. 처음 노르웨이에 도착했을 때 사람도 나무도 높다랐고 심지어 변기에 앉으니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산에서 만난 나지막한 관목 무리가 그렇게 다정하고 반가웠더랬다. 가을이면 분홍, 노랑, 갈색 단풍과 짙은 초록의 침엽수가 계단처럼 층을 이루는데 얼마나 아름다운지 처음 봤을 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내 산의 일부인 뒷동산에는 나만의 공간이 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을 벗어나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평상처럼 널찍하고 편편한 바위가 하나 있는데 흡사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 쓰였음직한 곳이다. 날이 좋은 날은 아침부터 해를 받아 낮에 가면 바위가 따끈따끈하다. 노르웨이는 여름에도 온기가 반가운 곳이라 무료한 날이면 친구들을 따돌리고 바위에 가 드러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소매를 걷어올려 살갗도 좀 태우고, 바람 따라 떠도는 구름을 바라보다 보면 구름의 모양을 따라 갖가지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다 잠이 들기도 하고 문득 추운 기운에 잠이 깨기도 했다. 어느 날은 누워 있는 동안 곰이 찾아오면 어쩌지, 나무는 못 타니 죽은 척해야 하나 하고 숨을 안 쉬는 연습을 해보기도 했다.
내가 살던 곳은 뒤로는 하피엘, 앞으로는 혼초라 불리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 배산임수 지형으로 자고 일어나면 한 마리 수달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드는 곳이다. 수영은 별 자신 없지만 노젓기를 좋아해서 시간만 나면 호수에 카누를 하러 갔다. 날이 좋은 날은 호수가 거울이 되어 하늘을 비추고 흐린 날은 뒤돌아보면 내가 온 길도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짙었다. 이런 날은 감히 배를 타고 나갈 엄두가 안나 미련 없이 포기하고 기숙사로 향한다.
오솔길을 따라 블루베리를 따먹으며 걷는데 손가락 사이사이 블루베리 가지를 넣고 두어 번만 훑어도 한주먹 가득 블루베리가 모인다. 한 번에 입안에 털어 넣고 오물오물 씹어먹고 나면 죠스바를 먹은 것처럼 입가가 까맣게 물든다. 북유럽식으로 블루투스라고 할까? 에릭슨이 상용화한 '블루투스'가 블루베리를 많이 먹어서 이가 파랗게 된 덴마크 하랄 왕의 별명이었으니까. 눈이 내려 열매가 다 떨어질 때까지 매일매일 따먹어도 블루베리는 부족하지 않았다. 지천이 블루베리라 매일 다니던 길을 조금만 비껴가면 얼마든지 무성한 가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매일 아무 걱정 없이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낮이 밤에게 잡아먹히기 시작할 무렵이었으니 10월 중순을 지났을 즈음일 것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백야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눈을 감았다 뜨면 고사이 어둠의 농도가 짙어질 만큼 밤의 힘이 강해진다. 오후 네 시도 안돼 어둠이 내려앉고 남아있는 블루베리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그날은 숲에 남아있는 끝물의 블루베리를 따러 나갔다. 블루베리에 설탕을 넣고 졸이는 콩포트를 만들어 갓 구운 팬케익에 얹어 먹을 요량으로 다 먹고 씻어둔 빈 아이스크림 통을 챙겼다. 낮에도 사람을 만나기 힘든 동네라 겁날 것도 없지만 안개가 자욱해 으스스한 기분이었다. 태양을 간유리로 싸놓은 듯 불투명한 빛이나마 사라지기 전에 한 통을 채우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맘때 가지 끝에 달린 블루베리가 얼마나 달콤한지는 먹어본 사람만 안다. 아이스크림 통에 후드득하고 블루베리가 떨어지는 소리는 기분 좋은 노동요다. 반통을 채우고 나니 손이 시렸다. 옷 춤에 손을 쓱 닦고 다시 가지로 손을 뻗으려는데 어디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냥꾼인가... 이런 날도 사냥을 할 수 있나... 하고 허리를 숙이는데 잠시 멈췄던 휘파람 소리가 다시 들렸다. 블루베리 따기를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오도독오도독 오솔길 위 작은 자갈을 밟으며 천천히 걷는 발걸음 소리가 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옛날 사진 정리를 하다가 끄적여본 소설...이라고 하기엔 여기까진 다 사실.
노르웨이에서의 시간은 나라는 사람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신과 독대하는 기분으로 머물렀던 곳, 존재에 대해 고민했던 시기다. 가끔 힘들 때 눈을 감고 그 공기 그 온도 그대로 꺼내 복기하면 마법처럼 웃게 되는 내 인생 가장 평안했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