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유럽연구소 Aug 29. 2017

억만장자 구두쇠, 잉바르 캄프라드가 사는 법

이케아 창업주 잉바르 캄프라드

부자! 수많은 아이들이 그토록 되고 싶어 하는 부자!

소득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는 북유럽에서 거부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2015년 블룸버그의 억만장자 순위에서 세계 9위에 이름을 올린 스웨덴인이 있었으니 바로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다.

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할아버지,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 (출처: 유튜브 캡쳐)


2015년 기준 캄프라드의 순 자산은 422억 달러다. 엄청나게 큰돈인 거 같기는 한데 도무지 감이 안잡힌다. 변환하니 한화로 약 47조 5천억 원이다. 여전히 감이 안 온다. ‘커피 한잔에 4,700원이라니’하며 비싸다고 투덜대는 나 같은 사람에게 47조는 비현실적인 숫자다.


47조 5천억 원은 도대체 얼마나 큰 돈일까? 2015년 대한민국 1년 예산이 375조 원이니까 대략 캄프라드 8명 = 대한민국 1년 예산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 대한민국 최고 부자인 이건희보다 네 배 더 부자다. 이건희 32명 = 대한민국 1년 예산. 유노왓암셍?(you know what I’m saying?)


잉바르(I) 캄프라드(K) + 엘름타리드(E) + 아군나리드(A)

잉바르 캄프라드, 이 남자의 이름은 낯설어도 이케아(IKEA)라는 브랜드는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케아는 가구를 비롯한 갖가지 생활소품을 파는 회사다. 2016년 기준 전 세계 50개국에 진출해있다. 2014년 겨울, 한국에도 입점했다. 이케아에 가려는 사람들로 매장이 들어선 광명시에 주말마다 교통 대란이 났을 정도로 화제가 됐었다. 하긴 유럽 사람들이 하는 우스개로 크리스마스에 교회보다 이케아에 가는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할 정도다.

이케아를 들어봤다면 잉바르 캄프라드라는 이름을 들어본 거나 다름없다. 이케아의 앞의 두 글자 IK가 바로 그의 이름 잉바르 캄프라드(Ingvar Kamprad)의 이니셜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 뒤의 두 글자 EA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농장 엘름타리드(Elmtaryd, 현재는 Almtaryd로 표기한다.)와 농장이 있던 마을인 아군나리드(Agunnaryd)의 첫 글자를 딴 것이다.


이케아 탁자가 매시간 수십, 수백 개씩 팔린다 해도 어마무시한 스웨덴의 누진세(한때는 수입보다 많은 세금을 매길 정도로 악명 높은) 제도 아래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가 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캄프라드 씨, 부자가 된 비결이 뭔가요?

지구 반대편에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일곱 살 아이들에게 비밀을 좀 털어놓으시지요.


"뭐 이젠 비밀도 아닌 공공연한 이야깃거리가 되었소. 부자가 된 비결이라…간단하지! 사실 난 돈을 거의 쓰지 않소이다. 당신네 회사 사장은 무슨 차를 타고 다니오? 나는 출근할 때 전철을 탄다오. 지난번에 올해의 비즈니스맨인가 뭔가 하는 상을 받으러 시상식에 갈 때도 버스를 타고 갔지.
차? 있기야 하지. 스웨덴 사람답게 볼보(Volvo)를 탔지. 1993년산 볼보 240 모델인데 벽돌로 조립해 만든 것처럼 각이 딱딱 잡힌 전형적 볼보 디자인의 차라오. 한 15년 몰다가 바꿨지. 아까워, 새 차나 다름없었는데 말이외다. 나는 안 바꾸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하도 위험하다고 하길래. 비행기? 난 비즈니스클래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오. 이코노미만 타거든. 그것도 항상 저가 항공사를 이용하지.
요즘 사람들이 절약을 안 해. 차를 마실 때도 티백을 한 번만 우리고 버리는데 나는 꼭 두 번 이상 우려먹소이다. 레스토랑 가면 소금이랑 후추를 집어 오는 건 기본 아닌가? 그 네모난 종이팩에 들어있는 거 있잖소. 한번은 호텔에 갔는데 목이 말라 미니바에서 음료수를 하나 꺼내 마셨지. 가격표를 보고는 먹은 걸 다 게워낼 뻔 했수다! 아주 도둑놈들이더구만. 아니 특별한 것도 아닌데 어찌나 비싸게 받는지, 내가 한걸음에 밖에 나가 편의점에서 같은 걸 사다 채워 놨다니까!
자주 가는 레스토랑이 있냐고? 그 요즘 말로 뭐라더라… 맛집 말하는 건가? 있다마다! 나는 주로 이케아에 가서 먹는다오. 왜냐고? 싸니까. 미트볼에 감자를 배불리 먹어도 4달러면 되는데 왜 딴 데를 가겠소?
그밖에 또 뭐가 있나 보자. 아, 선물은 언제나 세일기간에만 산다오. 뭐 젊었을 때는 나도 뭣 모르고 돈을 써댔지. 포르셰도 몰고 좋은 옷도 입고. 몇 년 안 가서 바꿨지. 다 부질없더라고.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눈에 거슬리는 게 한둘이 아니더구만. 이케아 직원 중에 이면지를 안 쓰고 버리거나, 나갈 때 전등을 안 끄고 나갔다가 내 눈에 띄기라도 하면 나한테 한소리 들어야 할 거요.”
Amy Schellenbaum 2013-03-29,


우수수…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자산가인 캄프라드의 간증을 듣고 부자의 꿈을 접은 일곱 살 아이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개인용 제트기 아니 항공사도 살 수 있을 만한 양반이 저가항공 이코노미석을 고집하고, 북유럽 신화에 등장할 법한 옛날 차를 모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그냥 별난 사람인가? 스크루지의 환생인 것일까? 그보다 캄프라드에게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


17살 소년의 창업과 친나치 활동

1926년에 태어난 캄프라드는 어려서부터 사업수완이 남달랐다. 10대 소년 시절 스톡홀름에서 성냥을 헐값에 대량 사다가 낱개로 팔아 돈을 모았다. 그다음에는 성냥, 장식품, 씨앗, 볼펜 등 종목을 넓혀가며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가져다 팔았다. 공부도 잘했는지 그가 17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자 금일봉을 수여했다고 한다.부모와 자식 간의 쿨한 관계 역시 북유럽의 특징이다. 아무튼 그동안 모은 돈에 아버지의 금일봉을 합쳐 1943년 그의 나이 17살에 창업한 회사가 바로 이케아다.


그럼 초기 이케아에선 무엇을 팔았을까?

스타킹, 지갑, 시계, 보석 그야말로 갖가지를 닥치는 대로 팔았다. 나중에는 우편주문 방식으로 판매를 확대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성장하는 사업 관리에나 신경 쓸 것이지, 어린 시절 10대의 캄프라드는 그 바쁜 와중에 시간을 쪼개 친나치 모임에 몇 차례 참석했다. 훗날 그 사실이 밝혀져 문제가 되자 그는 “뼈저리게 후회하는 과거”라고 고백했다. 캄프라드는 “내 삶의 가장 큰 실수”라는 제목으로 이케아의 전 직원에게 회사 메일을 통해 용서를 구했다. 친일행적에 관대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럽에서 나치와 관련된 일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치욕이다.


이후에도 캄프라드와 관련한 인터뷰에는 그의 친나치 행보에 관한 질문이 그치지 않았다. 더는 묻지 말아달라는 뜻인지 1998년 출간한 그의 책 [이케아의 역사; The history of IKEA]에서 그는 어린 시절 친나치 모임 참석에 대해 두 장(章)에 걸쳐 자세히 해명했다. 출간 인터뷰에서 캄프라드는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했다. 그와 같은 무지함에 대해 언젠가는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나 과거는 과거이니, 자신의 과거와 이케아를 연관 짓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1947년, 가구를 팔기 시작하다 

이케아를 창업한 지 5년째 되던 1947년부터 캄프라드는 가구를 팔기 시작했다. 그가 살던 지역에서 생산한 가구를 들여와 싼값에 팔았다. 당시에는 임시로 동네의 우유배달차를 빌려 물건을 배달했다. 이케아 가구가 인기를 끌자 캄프라드는 이제 모든 기업의 단골 전략이 된 ‘선택과 집중’을 선구적으로 실행하기로 했다. 다른 제품군을 접고 가구에만 집중했다.

이케아 쇼룸


1953년에는 이케아의 트레이트 마크인 쇼룸을 열었다. 이케아 매장에 가보면 통째로 사버리고 싶은 방이 한층 가득 줄지어 있다. 제품을 종류별로 모아 전시하는 대신 방 하나를 갖가지 이케아 제품으로 채우는 것이다. 물론 방마다 콘셉트가 다르다. 동물 카펫과 장난감이 가득한 어린이 방도 있고, 모노톤의 시크한 침실도 있다. 이케아를 방문한 사람들은 침대에 누워보기도 하고 푹신한 소파에 한참 앉아 있기도 한다. 이케아는 단순한 가구 매장이 아니다. 쇼핑을 위한 테마파크다. 이케아를 찾는 사람 역시 고객이 아닌 방문객이다. 이케아는 물건이 아닌 쇼핑의 경험을 제공한다.


가끔 스웨덴 친구들 집에 가면 이 방을 분명 어디선가 본듯한데 싶은 기시감을 느꼈더랬다. 지금 생각하니 아마도 이케아 카탈로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외로운 나의 우편함을 정기적으로 채워주던 이케아 카탈로그는 나의 필독서였다. 한가로운 주말 오븐에 넣어둔 머핀이 익을 때까지 시간을 빨리 가게 해주었다.

2017년 이케아 카탈로그


                                                                 

스웨덴 생활의 표준, 이케아

이케아는 스웨덴 생활의 표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나 공공기관, 식당에서 사용하는 물건 대부분이 이케아 제품이니 말이다. 이케아 컵, 이케아 의자, 이케아 테이블 등 이케아의 제품 규격이 표준 규격인 셈이다. 그러다 보니 다른 브랜드의 제품도 이 규격을 바탕으로 디자인한다. 이사 하는 친구에게 “그 TV 장식장 크기가 어떻게 돼?” 하고 물으면 “전형적인 이케아 TV 테이블 크기야.” 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케아 TV 테이블


스웨덴에서는 일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다들 독립을 한다. 새로운 공간을 살만하게 가꾸기 위해서는 가구를 비롯한 생활용품을 장만해야 한다. 빠듯한 학생 형편상 무토(Muuto)니 알바르 알토(Alvar Aalto)니 하는 절제된 세련미가 뚝뚝 떨어지는 북유럽 대표 고급가구는 꿈도 못 꿀 일이다. 현실에서는 대부분은 이케아 또는 중고가게를 이용한다. 스웨덴에 있는 동안 샀던 가구와 생활용품의 절반 이상이 이케아 제품이었다. 나머지 절반은 중고가게나 인터넷을 통해 샀는데 그 중에도 이케아 제품이 상당수 있었으니 사실은 절반이 더 될 것이다.

스웨덴 사람들의 집 꾸미기 애정은 별나기로 유명하다. 몇 차례 피카(fika: 달달한 디저트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후에 마음이 맞으면 집으로 초대하는 게 스웨덴 사람들이 친해지는 순서다. 요리도 대접하고 술도 한잔한다. 데이트도 집에서 많이 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개인의 취향이 드러나도록 공들여 집을 꾸민다. 여름이면 베란다에 색색의 화분으로 장식한다. 길고도 어두운 겨울이 되면 경쟁이라도 하듯 창마다 예쁜 조명을 내건다.


디자인의 ‘민주화’

주머니 사정이 취향을 지배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하지만 빠듯한 예산 치고 스웨덴서 살던 나의 학생 아파트는 꽤 예뻤다. 부엌 빼고 19m²인 내 작은 방에 들어오면 어찌나 아늑했는지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사실 서울의 내 방보다 더 공들여 꾸몄더랬다. 옆집 친구가 무겁다며 이사 갈 때 두고 간 두툼한 흰색 카펫으로 바닥을 깔고, 빨강과 오렌지 색의 방석과 쿠션을 곳곳에 놓았다.


계절마다 다른 색의 커튼을 걸었고, 역시 친구에게 얻은 중고 소파에는 고급스러운 천을 씌웠다. 등을 기대고 책 읽기에 최적화된 안락의자에 앉아 졸기도 많이 했다. 한국에서 날아온 전기장판에 반한 내 친구들은 몇 시간이고 떠날 줄 몰랐다. 큰맘 먹고 산 스웨덴 디자이너의 찻잔 세트를 꺼내 차를 따를 때면 나도 모르게 척추를 쭉 편 자세가 나왔다. 취향과 예산의 절충안이었지만, 서글픈 수준은 아니었다. 빠듯한 학생 살림에 계절마다 다른 소품으로 분위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이케아 덕이다.


디자인의 민주화를 표방하는 이케아는 좋은 디자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공급하는 것을 모토로 한다. 최고의 디자이너를 영입하는데 특별히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이케아 제품은 조립식이다. 분해하면 평평한 상자 안에 다 들어간다. 그렇게 배송 단가도 줄이고 배송 시의 파손위험도 줄였다.


궁여지책 전략이었던 DIY  

사실 이케아의 DIY(Do-It-Yourself: 네가 직접 하세요) 원칙은 피치 못해 나온 전략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급성장하는 이케아를 견제한 경쟁업체 공급자들이 이케아에 협력하기를 거부하자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세계적 기업의 제품 생산 원칙이 어쩔 수 없어 나온 것이라면 너무 없어보이기 때문에 캄프라드는 좀 있어 보이는 이유를 들고 나왔다.

“이케아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할 뿐 아니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기업이라오.”

이케아 매장에서는 한국의 여느 매장에서와같이 고객의 손짓 하나에도 즉각 반응하는 무한친절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다. 직원들은 다들 자기 일에 바쁜 것처럼 보인다. 무언가 물어보려면 여기저기 기웃대며 유니폼 입은 사람을 찾아 나서야 한다. 고객이 혼자 둘러보고, 맘에 드는 물건의 모델명을 확인한 후 지하에 가서 찾아 담아야 한다. 집에 들고 온 다음에는 스스로 조립해야 한다.


고객이 왕인 서비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케아는 불친절하다. 한 미국사람은 이케아를 두고 안티-서비스라고 했을 정도다. 하지만 여기에는 캄프라드의 깊은 뜻이 있었으니 최소한의 서비스와 조립식 가구를 내는 이유는 비용절감뿐 아니라 사람들이 자급자족하는 방식을 익히는 길이란다. 고객을 더 나은 독립적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함이라나.


한 가구상의 경전

이케아 홈페이지에 가면 ‘한 가구상의 경전’라는 제목의 문서가 있다. 캄프라드가 창업주로서 이케아의 동료 사원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그의 기업 철학이 담겨 있다. 1976년에 작성한 것인데 그 시기는 캄프라드가 높은 세금을 피하려고 스웨덴에서 스위스로 이민을 가던 무렵이다.



대중을 위해 더 나은 일상을 창조하라.
뛰어난 디자인과 우수한 기능의 다양한 제품을 가능한 많은 사람이 지불할 수 있는 낮은 가격에 제공해야 한다.
우리는 다수의 편에 서기로 했다.

다양한 제품군을 생산하되 뛰어난 기능과 품질의 제품을 합리적 가격에 제공해야한다. 이케아의 기본 제품군은 고유의 스타일을 갖추되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는 이케아 스타일, 국제적으로는 스웨덴 스타일로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 생산의 방침이다.

매번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이케아의 광고를 담당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란 영(Alan Young)에 따르면 이케아는 가구 판매를 너머 문화적 사명을 가진 기업이라고 한다. 생산의 모든 과정에서 이케아를 통해 다수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할 것을 목표로 두되 항상 남과 다른 창의적인 방식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잉바르 캄프라드가 이케아 동료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스웨덴의 정서를 대변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케아 스타일이 세계적으로는 스웨덴 스타일로 인식되도록 해야 한다는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케아의 제품은 다 고유의 이름이 있다. 그런데 죄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스웨덴식 이름이다. 앙비, 달라르나, 플로다, 룰레오, 스트룀스타드 등 스웨덴의 지명이나 명칭에서 딴 이름이 주를 이룬다. 제품의 이름만큼이나 이케아의 정체성도 스웨덴스럽다.


잠깐만요! 그렇게 치면 우리 작은 아버지도 캄프라드 씨가 절친 삼고 싶을 만큼 구두쇠라고요. 유행을 조롱하는 듯한 옷차림도 비슷하고. 하지만 부자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데, 정말 근검절약이 부자가 된 비결인가요? 그나저나 그토록 스웨덴스러운 이케아의 본사는 왜 스웨덴이 아니라 네덜란드에 있는 건가요? 네? 오늘은 여기까지!?



p.s.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 B컷(책에 포함되지 않은 원고) 중 하나입니다.


북유럽연구소 소장 @북극여우 입니다.

노르웨이, 한국, 스웨덴에서 공부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다 뜻을 품고 유학길에 올라 스웨덴의 웁살라 대학교에서 지속 가능 발전을 전공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만학도로 없는 기력을 발휘해 재학 중 웁살라 대학교 대표로 세계 학생환경총회에 참가했으며 웁살라 지속 가능 발전 관련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습니다. 스웨덴에 있는 동안 모 일간지 북유럽 통신원으로 일했습니다. 현재 북유럽 관련 연구와 기고, 강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 분야는 북유럽, 지속 가능성, 양극화, 사회 통합, 복지국가, 자살, 예술, 철학 etc. 저서로는『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지도자들』,『라곰』(번역)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