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북유럽연구소 Oct 04. 2017

옥중서신:김대중이 이희호에게

역사의 헤게모니는 지식인이 쥔다

대한민국의 10년 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

전해 들은 얘기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일본 소프트방크의 손정의에게 연락을 했다고 한다.

1998년 대통령에 취임했으니 IMF를 막 통과한 시점이다. 현재 한국은 너무나도 힘든 상황이지만 앞으로 10년 후를 위해 준비를 한다면 무엇을 하는게 좋겠냐 물었다고. 손정의는 시간을 주시면 고민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했다. 두어 달인가 후에 손정의가 친구와 찾아뵙고 싶다고 전해왔고 손정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와 함게 김대중 대통령을 찾아왔다. 그 때 두 사람은 대한민국 전체에 광통신망을 깔면 이후 IT 산업이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될것이라 조언했다고 한다.


손정의는 최근(2019/07/04)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BROADBAND BROADBAND BROADBAND라고 했다며 그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AI AI AI라고.


김대중 대통령은 두 사람의 조언을 따랐고 이후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인터넷 보급율을 자랑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휴대전화와 IT산업이 꽃피게 되었다. 말그대로 10년 후에.


열매를 맺은 건 김대중 대통령 재임 시절이 아니었지만 씨를 심고 물을 준 건 김대중 대통령이다. 아마 그게 지도자가 할일이겠지. 미래를 준비하는 것.


김대중이 이희호에게 보내는 <옥중서신>을 펼쳤다

출퇴근 길 지하철은 나에게 양질의 독서시간. 무거운 책은 들고다니기가 불편해 미뤄뒀었다. 연휴를 맞아 묵직한 <옥중서신> 양장본을 펼치는데 스웨덴어판 서문을 아웅산 수지가 썼다. 스웨덴에 김대중의 옥중서신이 발간되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그것도 1999년이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상을 타기도 전이다. 스웨덴 사람들이 국제 문제에 관심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고.


편지글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신앙관, 역사관, 정치 철학과 개인적인 면모까지 볼 수 있어 좋다. 스톡홀름의 노벨 박물관에 전시된 김 전 대통령의 깨알같은 글씨로 쓴 엽서가 떠올랐다. 부인인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편지인데 감옥에서 쉽게 쓸 수 없는데다 엽서도 귀해 정말 깨소금만큼 작은 글씨로 여백하나 없이 빽빽히 메운 엽서였다.


대단한 분이다. 그 통찰력은 어지간한 책에서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고, 삶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감동적일 정도다. 권력에 의해 생사를 넘나드는 비자발적 경험에도 강인하되 분노를 담아놓지 않는다. '난 사람'이고, '된 사람'이다. 세상에 '난 사람'도 많고 '된 사람'도 많지만 동시에 두 면을 갖추기는 참 어려운데, 그 동안 그 분을 대한민국의 정치 프레임에 가둬두고 지나치게 박한 평가를 하지 않았나 싶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신"

책을 보며 인상적이었던 건 이희호 여사에 대한 부분이다. 그 시절에 이미 문패에 "김대중 이희호" 이렇게 두 사람의 이름을 나란히 올렸던 김대중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를 아내이자 동지로 대했다. 편지 머리에 늘 등장하는 말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신"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연설에서도 자주 이 표현을 썼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아마 김대중 대통령이 쓰는 최상급의 호칭 형용이 아닐까.


목숨이 위태로운 시절, 감옥에 갖혀 가족을 돌볼수 없는 상황에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의 눈과 귀, 손과 발이 되어주었을 뿐 아니라 충고도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던 시절에도 남편의 선거 유세 옆자리를 지키며 지원 연설을 아끼지 않았다.


"내 남편이 대통령이 된 후 독재자의 길을 간다면 제가 제일 먼저 타도할 것"

이후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정치인의 아내에게서도 이런 당찬 말을 들어본 적 없다. 21세기 한국은 여전히 조신하고 참한, 나대지 않고 내조하는 여성이 추앙받는 시대인 듯 싶은데 말이다. 이희호 여사는 영부인인 동시에 이희호 한 사람만 따로 떼어 놓고 보아도 뛰어난 인권운동가이자 외교 전문가였다. 남편이 납치를 당했을 때에도 거리시위에 나섰고 국내외에 도움을 구했다. 때론 감금당하기도 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땐 전두환을 찾아가 남편을 살려달라 독대를 했는데 그때 전두환은 이희호 여사 앞에서 바지단 아래 손을 넣어 다리를 벅벅 긁었다고. 도무지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인간이다. 이후 이희호 여사는 자녀들과 감옥으로 면회를 와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 우리를 박해한 이들에게도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 때 만큼 아내가 존경스러운 적이 없었다며, 아내가 싫어할까봐 어긋나게 살 수 없다고 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에서 앞의 지아비 부夫와 뒤의 지어미 부婦의 순서를 바꿔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스웨덴의 올로프 팔메, 독일의 빌리 브란트, 오스트리아의 크라이스키와 미국의 카터 대통령 등 유럽과 미국에 지지를 요청하며 구명운동을 할때도 김대중 대통령은 중요할 일은 "그 부분은 당신이 누구보다 잘 아니 알아서 하시오." 라든지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당신이 해주시오" 라고 당부한다. 이희호 여사는 안사람이 아닌 동지였다. 아마도 이희호 여사는 출충한 외국어 능력, 신뢰감, 야무진 일솜씨를 갖추신 분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희호 여사의 생일 선물

그렇다고 동지애만 투철한 부부는 아니었다. 사석에서 이희호 여사를 뵌 적이 있다.

생일 이야기가 나와서 "김 대통령이 생일에 무슨 선물 주셨어요?" 하고 여쭈었더니 수줍게 웃으시며 생일이면 비서관들이 케이크를 준비해주었는데 김 대통령은 아무 말 않고 계시다가 케이크를 먹고 나면 '양품점에 갑시다.' 하셨다고. 그럼요, 생일이면 양품점에 가야지요.


김대중 대통령이 이희호 여사에게 쓴 편지는 한결같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당신”으로 시작한다.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쓰신 서문에는 “요즘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하오.”라고. 읽는 내 마음이 행복해졌다.


누군가에게 동지이고 연인이었던 분, 여러 업적과 평가가 있겠지만 누군가에게 정말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인생은 충분하지 않을까. 편히 쉬시길.                                                                                                  


+김대중의 통찰력

책을 읽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통찰력에 감탄한 부분이 있었다.


1977년10월25일 편지中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는 역사적 사명은 종전에 그 예가 없이 거창하고 막중한 것입니다. 첫째로 하느님은 우리에게 근대화(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경제)와 현대화(대중 민주주의, 복지경제)의 병행실행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미 독재정권 아래 경제개발이 막 발동을 걸던 무렵 1977년에 김대중은 경제민주화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스웨덴 복지 철학의 기초를 놓으며 나라는 '국민의 집'이라고 말했던 스웨덴의 정치가 페르 알빈 한손은 민주화를 정치민주화-사회민주화-경제민주화의 3단계로 나누어 보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근대화와 현대화가 이 민주화의 3단계를 풀어 써 놓은 것 같다. 자유 민주주의라는 것이 정치민주화와 다르지 않고, 대중민주주의가 사회민주화, 복지경제의 실현은 경제민주화와 통하는 데가 있기 때문이다.


2009년3월18일 일기中

인류의 역사는 맑스의 이론 같이 경제형태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 역사 같다.

1. 봉건시대는 농민은 무식하고 소수의 왕과 귀족 그리고 관료만이 지식을 가지고 국가 운영을 담당했다.

2. 자본주의 시대는 지식과 돈을 겸해서 가진 부르주아지가 패권을 장악하고 절대다수의 노동자 농민은 피지배층이었다.

3. 산업사회의 성장과 더불어 노동자도 교육을 받고 또한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노동자와 합류해서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4. 21세기 들어 전 국민이 지식을 갖게 되자 직접적으로 국정에 참가하기 시작하고 있다. 2008년의 촛불시위가 그 조짐을 말해주고 있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그 매커니즘의 중심을 돈으로 보았다. 다만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이념의 디자인이 달라졌다. 그런 면에서 경제형태 즉 매커니즘이 아닌 인간, 그것도 지식인을 헤게모니의 주체로 보고 역사의 흐름을 예측할 수 없는 생명체처럼 본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옥중서신 1,2편



사민주의는 평면적 정치이념이 아닌 정치와 경제 체계의 복합체인데 그 주체, 즉 demos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형태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북유럽이 교육기회의 평등, 언론의 자유, 성인교육에 아낌없는 투자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념을 만드는 것도 체제를 움직이는 것도 결국은 demos다. 사회 구성원의 연대의식, 평등정신, 정직함, 신뢰, 비판의식과 책임감을 갖춘 demos야말로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당부가 폐부를 찌르는 말처럼 느껴졌었다.


그 연장선에 "사람이 먼저"가 있다.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도 재화도 아닌데 지금은 돈을 지불하면 남의 인격이나 모욕에 대한 값도 지불한 줄 아는 이가 많다. '갑질'도 거기서 나왔다. 북유럽은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사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예측했기 때문에 효율성의 유혹에 빠져 선택적 복지를 검토하기 전 일찍부터 보편적 복지를 시작했다. 북유럽식 복지의 열쇠말이 디코모디피케이션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쉽게 말해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재화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한 개인이 비참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존엄성을 잃거나 재화로 전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장치가 복지인 것이다.


결국 경제형태가 아닌 사람, 그것도 지식인이 헤게모니를 쥔다는 것은 희망적인 일이지만 만약 지식인이 되는 길을 특정 부류가 독점하게 된다면 두려운 일이 될수도.


p.s.

편지 중간 중간 "똘똘이가 몹시 보고싶소. 똘똘이 사진을 보내주시오." 하는 부분이 있는데 똘똘이는 키우던 강아지라고. 똘똘이 사진을 보니 품종은 치와와인가보다. 우리 강아지도 치와와였는데 참 똘똘했지. :-)

이희호 여사는 충실하게 똘똘이 소식을 전하는데 그 다음 편지에는 "개 이야기를 쓸 때는 똘똘이 이야기만 쓰고 캡틴과 진돌이, 진숙이 이야기는 없는데 같이 알려주면 좋겠어요." ㅎㅎ 이러니 엽서의 여백이 모자라지.



북유럽연구소 소장 a.k.a. 북극여우 입니다.

노르웨이, 한국, 스웨덴에서 공부했습니다. 저서로는『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지도자들』(공저),『퇴근길 인문학 수업: 관계』(공저),『라곰』(번역)이 있습니다.


☞북유럽연구소 페이스북


매거진의 이전글 싱귤레러티, 기계가 인간을 앞지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