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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Mar 01. 2023

[초초분분] 오천 원으로 산 삶

track 01 / 걸어가자



앨범명: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







秒秒分分

오천 원으로 산 삶


글. 김해서




2018년 초가을부터 겨울까지 을지로에 자주 방문했다. 조명, 타일, 미싱, 인쇄 등 상공업 장인들의 거리에 젊은 예술가가 유입되고 개성적인 카페들이 생기면서 부흥하는 시기였을 거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밖을 오래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N회 차 방문을 한 다음에야 내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골목들이 세상 힙한 데라는 걸 알았다. 기계 굉음, 좁은 골목을 정신없이 오가는 오토바이, 담배 연기와 공장 기름 냄새, 노포 음식점 냄새 등이 섞인 매캐한 공기 덕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요리조리 살피며 다녔다. 그러다 내가 갈 만한 새로운 곳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커피사라는 곳은 지금도 근처를 지날 일이 있으면 방문할 정도로 마음에 드는 곳이다. 당시엔 그림작업실로도 쓰였는데(지금은 작업실로 사용하지 않아서 아쉽다) 갖가지 붓과 물감, 이젤 등을 앞에 두고 따뜻한 것을 홀짝이는 기분은 나름 근사했다. 청소년상담복지센터를 방문한 후 담당 선생님과의 대화를 잘 되새김질하려면 조용하고 편안한 환경이 필요했다. 추위에 몸을 떨다 커피사로 들어가 카모마일 티 한 잔 마시며 숨을 가다듬는 나의 루틴. 



한동안은 상담을 받은 후에도 '무엇이 잘못된 걸까?', '난 이제 뭘 더 할 수 있지?' 따위의 답 없는 의문들이 가시지 않았다. 돌고 도는 대화가 답답해서 다른 곳을 알아봐야 할까 싶어 카페에서 열심히 서칭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금세 풀이 죽어 포기했지만. 



그때 나는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한, 돈 없는 대학생 신분이었다. 매운 떡볶이, 세일하는 구제옷, 시집, 카모마일이나 페퍼민트 티를 소비할 수 있는 정도면 그럭저럭 만족하던 내게 돈이 더 필요하게 된 것이다. 상담 치료라는 것도 부지런히 돈 버는 사람들이 받는 거였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나이 스물넷을 넘기지 않아서 '청소년'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에, 나는 내 청소년기의 마지막을 서울시가 운영하는 청소년상담복지센터로 장식한다. 회당 오천 원이면 됐으니까. 비싸고 아니고를 떠나서, 지갑에서 오렌지색 종이돈이 사라지고 체크카드에서 일정하게 금액이 빠져나갈 때면 괜히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닿으며 의기소침해졌다. 차 한잔 값을 대가로 고통이 사라지나?



내 고통은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정도의 고통이었다. 꽁꽁 언 손으로 무거운 비닐 장바구니를 들고 삼사십 분을 내리 걷는 통증과 비슷하다. 손가락 살을 파고드는 비닐 손잡이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람을 간신히 붙잡은 것처럼 묵직하고 위태롭다. 손잡이가 끊어져서 모든 게 바닥에 쏟아질까 두렵고, 손가락이 끊어질까 봐 서럽다. 빨개졌다가 창백해기를 반복하는 손마디가 점점 감각을 잃고 '얼얼함'이라는 장갑 속으로 숨는다. 정신도 몸도 하루종일 얼얼했다. 스스로 뺨을 내리쳐도 손이 아픈 건지 얼굴이 아픈 건지 구분할 수 없었다. 덜컥 겁이 밀려든다. 더 이상 아무것도 구분할 수 없어서,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아는가. 책임져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아픈 동생을 이해하고 달랠 수 있는 건 나뿐인데! 여태 적은 시들을 이대로 버릴 순 없는데! 부모님 근심을 덜려면 얼른 돈이 되는 꿈을 찾아야 하는데!



상담실 안에서 처음 담당 선생님을 마주할 때, 나는 커다란 의심을 품고 손을 탁자 위로 올려두었다. 제 발로 찾아갔으면서, 어디 한 번 주먹 안을 볼 수 있으면 보라는 심보였다. 그러나 회차가 거듭될수록 그 오기는 묽어진다. 선생님은 아주 꼼꼼하게 내 상황을 묻고 시종일관 친절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약하다. 내담자의 고민을 정말 진지하게 들어줬고, 가족 일이나 시에 관해 떠드는 말속에서 내 노력과 진심을 발견해 존중해 줬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시간에 임할수록 마음은 꺾여갔다. 그분이라고 해서 내 짐을 나눠 들어줄 수는 없다는 결론만 날 뿐이었다. 



상담을 그만둘지 말지 고민하던 어느 날. 여전히 선생님 앞에서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하며 정말 끝이 다가옴을 실감하고 있었다. 불안에 휩싸인 동생과의 대화가 하루에도 몇 시간씩 이어져서 힘들다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 광주에 있는 병원이나 센터를 알아보는 것도 나뿐인 게 괴롭고 외로웠다고 했다. 시도 점점 쓰기가 두려워지고, 시 말고 생계를 위한 다른 일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나 해댔다. 잠자코 듣고 있던 선생님이 입을 열더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단호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해서 씨, 동생에게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처음에 나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여 '아니 대체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딴생각을 했던 거야?' 싶어 황당했고, 따지듯 되물었다.



"제가 동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요. 걔가 죽으려는 마음을 먹지 않도록 해야 하잖아요?"

"왜 유일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

"해서 씨가 그렇게까지 상대의 면면에 다 반응해서 혼자 나서 해결책을 만들려는 것은, 동생과 부모님의 역할을 뺏는 거예요. 동생은 죽지 않을 수도 있어요. 분명 괴롭겠지만, 해서 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부모님도 지금까지 해서 씨와 동생분을 키워내셨듯 부모님 나름의 방식으로 동생을 보호할 거예요. 그걸 못 믿는 건가요? 해서 씨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으로만 고치려고 하는 건, 어쩌면... 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어버리는 것일지 몰라요. 모두에겐 저마다의 입장이 있어요."

"... 잘못되면 어떡해요?"

"... 잘못될 수도 있는 거죠."



처음으로 인생이 내 것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이 결국 날 위한 일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삶은 노력과는 상관없이 망가질 수도 있고, 끊어지기도 하고, 되풀이될 수도 있는 거였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혹자는 상담에서 대단한 해결책을 기대하기보단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 의의를 두라고 조언하는데, 나는 그날 꼭 필요한 말을 처방받았다. 잘못 이해하면 낙담만 하게 될 대답이었으나, 신기하게도 나는 그때 필사적으로 그 대답을 붙들었다. 



내가 달려드는 방식 대로 내가 기대하는 내용 대로 생이 굴러가는 게 맞다고 본 오만한 나 자신이 치욕스러우면서도, 기뻤다. 그렇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삶이 우리를 일으켜 세울 수도 있다는 얘기니까. 살아있음이 경이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진통은 나나 당신들이 특별히 잘못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삶이 진행되는 중이라서, 사랑하는 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 곁에 살아있어서 그렇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모두가 안타깝고 모두가 보고 싶었다.



"해서 씨, 최근에 친구들이랑 합심해서 잡지도 만들었다면서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더니 뭐든 하고 있잖아요. 쭉 글을 썼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겠죠? 글만 써서 글밖에 모르겠다더니. 시가 어딜 가겠어요. 뭐든 할 수 있어요. 가족분들도 여태 그랬던 것처럼 해낼 거예요."



그런가. 

계속하면 계속될까. 



그날 이후에도 몇 번 더 을지로를 찾아갔다. 친구들과 만든 잡지를 한 권 챙겨 선물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정말 우리가 헤어질 때가 됐음을 알 수 있었다. 그도 그렇게 생각했고, 앞으로도 건필하라며 싱긋 웃어주셨다. 나는 수줍게 바닥을 봤다. 사실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잘할 자신과는 별개로 잘 사랑해 보려는 마음이 태어났다. 세게 움켜쥔 손에 힘을 풀며 일어날 일을 기다리는 것, 그것도 사랑의 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마지막 상담을 마치고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려는데, 공교롭게도 생일이 지나 성인 비용인 만 원을 내고 나왔다. 청소년의 두 배. 



두 번째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계속 살아갈.





秒秒分分 OST

track 01/ 루시드폴 - 걸어가자 (2009)


걸어가자 처음 약속한

나를 데리고 가자

서두르지 말고 이렇게

나를 데리고 가자

걸어가자 모두 버려도

나를 데리고 가자

후회 없이 다시 이렇게

나를 데리고 가자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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