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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서 Mar 06. 2023

[초초분분] 멀리 가는 꿈

track 03/ 꿈

앨범명: 타인의 고통







秒秒分分

멀리 가는 꿈


글. 김해서




꿈은 무엇일까. 꿈에도 문이 달렸을까. 나는 지금 손잡이를 못 찾고 있는 것일까. 열쇠가 필요할까.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 디지털 도어록인가. 문 가까이에도 못 다가간 건 아닐까. 꿈은 누구의 집일까. 이미 누가 살고 있을까. 나는 손님이라서, 노크하고 초인종을 눌러야 하나. 눈치를 보고 들어가는 게 맞는 걸까. 주인행세를 해도 될까.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문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까. 그럼 난 다시, 다시, 또, 그렇게, 다시. 


몇 년 전, 회기동에서 살았을 적. 해가 저물면 정릉천을 걸었다. 또래의 젊은 청년들은 러닝화도 챙겨 신고 기능성 운동복도 입으면서 달린다지만, 그런 걸 살 돈도 관심을 둘 여력도 없었다. 목이 다 늘어나서 못 입게 된 티셔츠와 엄마 회사 동료가 샀지만 발에 맞지 않아 엄마에게 나눔 했다는, 나에게도 다소 큰 운동화를 신고 걸었다. 뛰기도 싫었다. 뛰면, 심장이 덩달아 빨리 뛸 테고, 그러면 나로부터 무언가가 흘러넘쳐버릴 것 같았다. 이를 테면, 울음이나 걱정이나 조바심 같은, 점도는 다르지만 액체형 감정들이. 


뭐가 됐든 다 흘려보내버리는 쪽이 건강에도 좋지 않겠냐고 물어올 수 있겠다. 그렇겠지. 그랬으면 됐겠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의 나는 아무것도 잃기 싫었다. 정신을 좀먹는 것이라도 마음에 지닐 무언가가 필요했다. 슬프면 제대로 슬퍼야 했고, 스스로 저주스럽다면 본격적으로 저주해야만 했다. 간절히 원하는 게 있는데 간절하지 않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시인이 되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채 있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이다. 괜찮지 않았으니까 괜찮을 수는 없다. 


그걸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아는 사람은 <꿈>을 부른 김윤아가 유일해 보였다. ‘때로 너의 꿈은 가장 무거운 짐이 되지’로 시작하는 노래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도 유유히 흘러가는 정릉천과 열심히 달리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어디에도 녹아들 수 없을 것 같은 나 자신을 견딘다는 건, 그렇게 청승을 떠는 일이다. 세상의 속도대로 갈 순 없었다. 소가 쟁기를 끌듯 무거운 나 자신을 견인하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공기마저 물살처럼 느껴졌다. 내가 질질 끌어당기는 여러 개의 ‘나’ 중에 ‘시 쓰는 나’는 가장 열정적이었고, 가장 말이 많았으며, 반항적이었으나 의리가 있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쓰고 제출하고 탈락하고 비관하고 부끄러워했다가 다시 또 쓰고 탈락하고 욕하고 수치스러워하고 기어코 계속 쓰며 겸손함을 배워나갔다. 


그럴 수 있었던 건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혹은 ‘기필코’는 내 꿈의 접두사처럼 달라붙어 분리될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내 꿈은 다른 꿈과 의미가 달라야 한다. ‘언젠가는’을 뺀 단지 그저 좋은 꿈으로만 의미를 내재화하는 것은, 현실에서 패배하고 져도 상관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저기 저 아저씨가 산책시키는 개도 언젠가의 간식, 언젠가의 여자친구, 언젠가의 낮잠을 꿈꾸며 살 텐데. 보상 없는 삶이라고 한다면, 저 개는 아저씨가 쥔 목줄에 잠자코 묶여 그와 발맞춰 걸을 이유가 없다. 당장 목줄을 뜯고 다른 개와 사람을 공격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나는? 언젠가는?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으나 이 출렁거리는 울음과 걱정과 조바심을 막무가내로 쏟아내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유가 있다면, 입술을 깨물며 다시 또 시작해보려 하는 이유를 말하자면, 단 하나. 내가 시작했기 때문에.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목줄을 둘렀기 때문에. 


그래서 꿈이 설사 목줄을 거칠게 다뤄 정신을 쏙 빼놓는다 할지라도, 원하는 때에 갈증을 해결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꿈의 속도에 맞춰 걸어야 한다. 언젠가는 그날이 올 거라 믿으면서. 


아무도 누군가의 간절함 자체에는 관심 없다. 간절함은 누추해 보이는 경향이 있어서, 간절함이 낳은 것만이 유익하다고 볼 뿐이다. 심지어 이룬 자들의 처음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이슈가 되지 않는다. 모두들 ‘다 이룬 여유만만한 표정과 온화한 미소’에 환호하며, 가난과 좌절의 쓴맛을 성공을 돋보이도록 하는 축하꽃다발쯤으로 해석해 버린다. 성공한 사람들 역시 또다시 자신의 꿈을 구체적으로 조각하기 위해 떠나야 하고, 갈 길은 언제나 구만 리라는 것을 강조하는 사람은 없다. 무참할 정도로 그렇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꿈을 품는 자들은 모두 폐허에 물을 주는 사람들이다. 이곳의 황폐함을 기억하는 자는 자신이 유일할 테고, 속절없이 바람만 오갈 뿐인 허공을 길러내는 일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심는 자. 싹을 보려는 자. 기대하는 자.

언젠가 연준 선생님이 날 생각하며 적어준 글 덕분에, 나는 내 꿈의 유통기한을 죽는 날로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역시 나는 마음먹으면 잠자코 그리 살아야 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자, 멎을 날이 있을까 싶었던 내 안의 액체들이 가라앉을 조짐이 보인다. 염려와는 달리, 수위가 낮아진다고 해서 영혼이 흐려지는 게 아니었다. 잠겨있던 또 다른 여러 감정들이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역시 내가 삶으로, 시로 품어야 할 것들이었다.


“네가 시를 통해 말할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일 거라는 것을 알아. 그것 때문에 자꾸 시로 돌아온다는 것. 해서, 우리는 멀리 가야 해. 설사 네가 등용문을 거쳐 ‘시인’이 되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없단다. 그저 사람들이 벽을 터치하는 네 모습을 ‘공식적으로’ 보게 된 것일 뿐. 어쩌면 네 시를 좋아하는 독자 몇 명이 버섯처럼 돋아날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것뿐이야. 멀리 가야 해. 아주 멀리, 오래. 그러니 시를 손에 쥐려 하지 말고, 활개치거나 사라지도록 놓아주면서 가자. 나도 가야 해. 멀리. 같이 가자.” p. 178 박연준, <쓰는 기분>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했지만 여전히 '가는 사람'이다. 여전히 기나긴 미로의 벽을 터치하며 간다. 시 대신 에세이로 먼저 독자를 만났고, 어떻게든 시로도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 궁리하며 소소한 도전을 이어가고 있다. 매일 ‘이게 맞나?’ 의심하면서도 꾸역꾸역 살아낸다. ‘언젠가’를 정말로 내 삶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언젠가’로 재설정하게 되면, 실패가 실패로만 남지 않는다. ‘같이 가자’ 던 연준 선생님의 말을 곱씹는다. 갈 길은 멀지만, 같이, 정말로 같이.


꿈이 잔인하긴 해도 한 가지 좋은 효능은 있으니 이건 꼭 말하고 글을 맺고 싶다. 꿈은 사람을 계속 살게 한다. 살게 함으로써 삶엔 꿈 말고도 품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삶을 이루고 싶다는 더 큰 꿈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자기 삶이지만, 우리, 이 삶을 뜻대로 되지 않는 어린아이쯤으로 여겨보자고 한다면 어떨까. 힘이 될까. ‘활개치며 사라져 버리는’ 아이를 좇는 서로를 살피며, 어디 많이 불편하진 않은지 확인하고 응원이 필요한 사람을 응원하면서. 





秒秒分分 OST

track 03/ 김윤아 - 꿈 (2016)


(.. 생략)

너의 꿈은

때로 무거운 짐이 되지

괴로워도 벗어 둘 수 없는 굴레

너의 꿈은

때로 비교할 데 없는 위안

외로워도 다시 한번 걷게 해주는

간절하게 원한다면 모두

이뤄질 거라 말하지 마

마치 나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

마치 나의 꿈은

꿈이 아닌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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