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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2X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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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리 May 09. 2024

기억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18의 증거


애가 너무 순해, 엄마가 곁에 없어도 어쩜 한 번 울지를 않고 얌전했지. 어렸을 때부터 넌 그랬다. 이담에 많이 먹고 키 커서, 저거 이겨버려라. 공부 열심히 해서 이겨버려. 그럼 네가 이긴 거다. 네가 이긴 거야.


언니와 다투고 혼자 울고 있으면 할머니는 내 옆에 누워 말했다. 나는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손등을 매만지며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난 할머니 피부가 좋아요.

다 늙어서 흐물거리는 게 뭐 좋아.

부드럽잖아요.


습한 화장품 냄새를 맡으며 부드러운 뱃살을 만지작 거렸다. 꼭 바람 빠진 풍선 같다고 생각했다.


여우, 이 여우. 할머니가 여우라고 부르는 건 무슨 뜻이게? 예쁘단 뜻이다. 그 말에 배시시 웃어 보였다.


기억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할머니의 기억 속에 나는 언제나 아홉 살 같았다. 몸만 자란 아홉 살 여우, 이 여우.


할머니는 전과 달리 모자를 쓰고 다니신다. 언니의 안부를 물으며 내 안부를 물으신다.


며칠 전 엄마는 언니가 할아버지를 옆에서 부축하고, 할머니와 단둘이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언니는 달라졌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나를 보면 묻는다.


요즘은 언니가 안 괴롭히냐? 나는 웃으며 답한다. 아니야, 할머니. 언니는 달라졌는걸. 그리고 이젠 내가 이겨요. 할머니는 내 손을 잡고서 좋아하셨다.


할머니는 점점 어려지고 있다. 이윽고 본디 태어났을 때처럼 작은 점으로 돌아가겠지. 그럼 할머니는 영원히 늙지 않고 내가 아홉 살이고 언니가 열세 살일 적에서 살 것이다.


할머니, 할머니는 언니를 어떻게 기억해? 언니는 할머니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언니가 지금 아무리 잘해줘도 어릴 적 얌전하기만 했던 나보다 좋아질 순 없을까?

아홉 살의 나는 옷에 카레가 쏟아져도 조용히 괜찮다고 했대. 언니는 내가 항상 괜찮다고 하는 게 싫대.


난 내가 운이 좋은 아이라고 생각해. 운이 좋게 잘 참는 아이. 그러니까 언니는 운이 좋지 않은 아이였던 것뿐이야.


기억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나는 이제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그지 않는다. 신발 뒤축을 구겨 신을 때도 있다. 다 쓴 휴지를 둘둘 말아놓지도 않는다.


그러나 할아버지, 당신은 여전히 날 사랑하죠? 그건 내가 얌전한 아이였기 때문에. 엄마를 닮은 아이였기 때문에. 당신의 기억 속에서 난 영원히 당신을 닮아 정리정돈을 잘하던 아홉 살이기 때문이다.


있지, 할머니. 만약에 말이야 당신이 죽었을 때 눈물이 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 내가 만일 억지로 눈물을 짜고 있으면 어떻게 하지? 그럼 당신은 날 미워할까?


나는 여우. 교활한 여우.

교활한 것은 연약한 것. 연약한 것은 교활한 것. 그러니까 여우는 연약해. 나는 연약해. 당신이 날 미워하면 콱 울어버릴 거야. 아홉 살, 그때 내가 언니를 미워했었던 것처럼 당신을 미워할 거야.


그럼 당신이 달래줘야 해. 당신을 미워해서 우는 나를 달래줘야 해.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여우니까. 아홉 살 여우는 연약하니까.


교활한 여우는 동정이 가장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사랑이란 걸 압니다.


그러니까 이건,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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