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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리 May 12. 2024

너를 통해 보는 나를 사랑할 수 있다면

17의 습관


 사주를 믿지는 않지만, 굳이 따지자면 나는 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는 동요 없이 잔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들여다보면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심연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다.


 사실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 우리가 그들의 심연을 엿보게 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심연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제법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한 곳을 지켜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심연의 색이나 깊이가 다르기도 하다.

 

 어릴 적 나는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싶어 하는 강박 같은 게 있었다. 상대가 파악되지 않으면 마음을 열기가 두렵고 거부감이 들었다(그러면서도 나의 심연은 감추고 싶어 했다). 청소년기 자아가 형성되는 무렵 지켜보았던 아이들의 심연을 나는 아직도 전부 기억한다.


 어떤 누군가의 심연은 너무 투명해서 진짜 바닥이 아닐 거라고 의심하기도 했고, 또 누군가의 심연은 지나치게 깊고 어두워서 제가 본 것을 착각이라고 치부해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의심이나 착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해결되는 것이었다. 나름대로의 방법을 습득한 뒤부터는 나와 비슷한 심연을 가진 사람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의 내가 택한 것은 상대의 심연에 나를 끼워 맞추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너무나 닮아 있다고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그리고 상대의 아픔이 내 아픔인 것마냥 같이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다.


 상대에게 나를 투영하고 동일화하는 과정에서 부푸는 감정은 사랑과 닮아 있다. 특히 자아감이 형성되지 못했을 때는 더더욱.


 불확실한 스스로의 심연보다는 상대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더 명확하고 간편하다. 왜냐하면 동정은, 나보다 타인에게 베풀 때 굉장히 너그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상대를 통해 나를 마음껏 동정하고 안쓰러워하는 것이다. 상대의 심연에 같이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음을 인지하는 순간에는 이미 늦어 있을 확률이 높다. 건강하지 못한 감정으로, 건강하지 못한 방식으로.


 사랑이라는 예쁜 포장지 아래 감싼 나의 심연은 상대의 심연과 섞여 전보다 더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온전히 우리를 판단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스스로를 인지하고 정의한다. 나는 타인의 말에 휘둘리지 않아,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완전히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결국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므로.

 

 혹시 당신이 사랑하지 않는 타인의 말에도 영향을 받는다면 편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한다. 상대를 통해 보는 나는 어떤 모습인지. 사랑스러운지, 혹은 가여운지. 상대를 통해 보는 스스로의 모습이 마음에 든다면 그 사랑은 제법 괜찮은 모양새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제와 돌이켜 투영과 동일화로 이루어졌던 감정이 모두 거짓이었다고 치부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기 서글프다면 서투른 만큼 진심이었단 것일 테니까. 그런 사랑이 있어서 현재의 사랑이 더 온전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하트 모양의 젤리 같은 거라 조금만 힘을 가하면 그 형태가 쉽게 변하지만 그래도 가만히 두면 금방 원래의 하트 모양으로 돌아간다. 나는 그 정도의 사랑이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파악하고 정의 내리려고 했던 17의 고약한 습관은 버리려고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여전히 궁금하다.


 너를 통해 보는 나는 어떨까.

 사랑스러울까 가여울까. 혹은 둘 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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