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치 떨어지면 소란스럽지 않다.
'나는 분리되는 일을 반복하는데.' 좋아하는 노래 속 한 구절이다. 간결한 문장에서 묵직한 공감을 느낀다. 나는 외부 현실을 제3자의 일처럼 관조하는 듯한 성향이 있다. 방금 이 문장에서 현실을 외부라고 표현한 것도 참 나같아서 그럼 그렇지 싶다. 나를 둘러싼 주변 세상을 마치 한 편의 영화 관람하듯 바라보는 느낌이라면 비슷한 표현일까. 그 안으로 직접적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 발 짝 물러나 거리를 둘 때가 많다. 동전의 양면성처럼 모든 것은 장단점이 있다만, 천성을 장점으로 활용하지 않으면 뭐 어쩔 수 있겠나 싶다.
모든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다. 남편과 애기에게도, 타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예외는 없다. 겉으로 보여지기로는 자칫 무심한 스탠스를 취하듯 비쳐질 수 있다. 내 딴에는 무심함이 아닌데, 그도 그럴것이 웬만큼 큰일이 아닌 것에는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초연하다면 초연하고, 관점에 따라서 무심하다면 무심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그 말은 지금 적합하다. 물러나 바라보는 인생이 희극인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상황에서 거리를 두는 행위 덕에 사소한 일에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다. 어쩌면 대수로운 일에도 이 마인드를 덧대면 심각해질법한 그 무게를 덜어낼 수 있었다.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면 고요해진다. '필요 이상'의 세상만사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요지경의 사전적 정의는 '상자 앞면에 확대경을 달고 그 안에 여러 그림을 넣어서 들여다보게 한 장치' 란다. 일상에서 눈에 담기는 수많은 상황들이 있다. 요지경 속에서 얽히고설켜 스쳐가는 모든 장면을 구태여 붙잡을 이유는 없다. 외부 세계는 늘 무엇이든 과잉되고 대부분 요란스럽다. 과부하를 일으킬 요소들이 즐비하다. 에너지가 여러 틈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비축하는 내 나름의 생존 본능이라 할 수 있다. 한 발짝 떨어져 지나가도 될 것들을 흘려보내며 관망한다. 그렇게 내게 진짜 필요한 것들을 취사선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