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이 현실을 잡아먹게 하고 싶지 않다.
평소 남편과 나의 가치관이 상이한 부분이 있다. 목표에 있어 남편은 적성을 배제하고 당장의 경제적인 성과를 내는 것을 중요시해왔고, 반대로 나는 목표를 잡아도 그 안에 내 적성과 성향을 담을 수 있어야만 했다. 남편이 성과를 지향하는 현실적인 사람인 반면, 나는 그놈의 자아실현을 포기 못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남편은 땅에 발을 먼저 디디려했고 나는 땅에서 붕 떠 있어도 흘러흘러 막연하게나마 어딘가 다다르길 바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일까, 이상이 밥 먹여주지 않음을 깨달은 걸까, 패기가 꺾여 재미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이제야 정신을 좀 차려 나를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까. 이유야 어쨌든 현실적으로 변해가는 스스로가 싫지 않고 편안하다. 내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야 할 것만 같았던, 잡힐 듯 잡히지 않던 그 이상을 내려놓아도 크게 아쉬울 것이 없어졌다.
이상이 나를 갉아먹는다면 건강한 이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방향으로 향해가는 그 과정이 물론 고단할지라도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면, 버틸 수 있는 강력한 계기가 있다면, 보상이나 변화가 없어도 언제까지 감내할 수 있을 자신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할 이상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려왔던 이상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버겁게만 만들어, 더 이상 내게 건강하지 않은 이상임을 알아버린 것 같다. 누구나 바라는 통상적인 이상적 모습이 있다. 적성과 성향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 자유를 누릴 수 있는 환경, 거기에 감사하게도 따라오는 어떤 경제적 보상까지. 누군가 이상적으로 살 수는 있어도 어느 누구나 그럴 수는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상의 부작용이 있다면 이상을 누리는 것이 마치 당연한 디폴트처럼 삶의 진리마냥, 이상적이지 못한 평범한 삶은 패배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미디어에 노출되는 수많은 단편적 케이스는 모두의 삶이 이상 속에 있어야 함을 더욱 당연한 것처럼 만들기도 한다. 미디어에서는 대부분 최정상의 모습만을 보여주는 반면 이면에 드러나지 않는 곳을 속속들이 노출하지는 않는다.
원하는 것이 명료해졌다. 나는 별생각이나 고민 없이 내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단순하게 누리고 싶어졌다. 답이 존재하거나 정의 내릴 수도 없는, 정체성 타령하며 적어도 '내게는' 더 이상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지 않다. 과거처럼 아이와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에도 소위 이상적 고민과 불안에 잠식되어 정작 정신은 딴 곳에 팔려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
오래 전, 책에서 스쳐 마음에 새겨진 한 문장이 있는데 지금도 깊은 공감을 일으킨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어느 것도 보장된 것은 없다. 내게 현실적으로 산다는 건 완벽한 확실성을 찾고자 하는 것이 아닌, 확률적 그리고 상대적으로 보다 현실 가능성이 높은 선택지를 택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줄여가는 취지일 것 같다. 불확실성을 덜어가면 완전한 미지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함은 점진적으로 사라질 테고, 그로부터 오는 안정성은 명료한 일상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이제는 현실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이상이 현실을 갉아먹는 지점이 온다면 나는 그 이상을 정도껏 등한시하고 싶다. 삶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일상적 순간을 온전하게 누리고 싶을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현실적으로 살고 싶어져버렸다. 현실적인 것은 팍팍하게 메마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적인 보상이 주는 안정감은 삶을 단순하고 순수하게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이제는 내 이상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고 현실적으로 경제적인 성과를 먼저 내보일 수 있는 방법으로 눈 돌리고 싶다. 이상을 좇는 여행은 쉬어가며, 내가 누려야 마땅한 일상에 형체 없는 고민이 개입하게 하고 싶지 않다. 현실이 먼저 충족이 되고 부수적인 보너스 개념처럼 이상을 누리고 싶다. 이상이 나의 현실이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닌, 지극히 현실적인 현실을 먼저 잘 살아내 그 현실 속에서 꾸려갈 수 있는 소탈한 이상을 발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