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6일, 운명의 시작

서쪽을 동경하던 아이

by 보통의지영

처음 한국을 떠나 서쪽을 향해 유럽 땅을 밟은 건 2002년 월드컵이 지나고, 가족여행으로 유럽 패키지 투어를 갈 때였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북극항로를 이용하지 않아서, 8시간 넘게 좌석에 앉아 창 밖을 바라보면 사막과 목초지처럼 보이는 곳을 가도 가도 다 지나지 못하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후유증을 태어나 처음 겪는 여행이었다. 이륙한지 5시간째부터 여행의 설렘과 이륙의 짜릿함은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취리히를 거쳐 런던에 도착을 하고 진홍색 버버리 코트를 입은 가이드의 우산을 겨우겨우 따라 다니며, 대영박물관을 시차 지옥에 빠져 반 졸며 다녔더랬다. 새나라의 어린이라는 별명답게 나는 한국시간으로 정확히 밤 10시, 그러니까 현지시간으로 오후 3~4시가되면 좀비처럼 반 수면 상태로 겨우겨우 일정을 따라 잡았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당시 패키지 투어에서 런던은 1~2일이면 끝이었고,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를 넘어가서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모나리자 그림 앞에서 좀비처럼 다녔고, 지금은 재가 되어버린 노트르담 성당에서도 겨우 카메라를 바라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몽유병환자처럼 파리 일정을 마치고 패키지 투어 버스에 올라 스위스 융프라우에 다다를 때쯤 시차를 극복하고 지금도 기억할 수 있는 경험들을 하나 둘 추억으로 저장해 두었다. 내 제 2의 고향이자 운명의 땅, 이탈리아의 기억도 생생하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한국으로 다시 오르는 순간 까지도 초반 일정에서 시차때문에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아쉽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적응한 시차는 한국에 와서도 나를 괴롭혔는데, 새벽 2시만 되면 눈이 떠졌고 그 때마다 첫 유럽여행에서의 나의 기념품들과 박물관 팜플렛, 입장권 등을 만지며 다시 추억을 되짚었다.


그 후로 한동안 유럽을 잊고 살았다. 영어를 전공하면서 내 관심은 온통 미국이었다. 유럽을 가고싶어했고, 그리워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하루 살이처럼 월요일부터 주말까지 정신없이 달력에서 하루하루를 지워나가기만 했다. 차마 사색이라는 것을 할 짬 조차 없었고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사치같았던 어느 겨울 날, 남편이 내게 넌지시 물었다.

"내년에 이탈리아 주재원으로 발령날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그 당시에는 생각이라는 게 없었다. 하루하루 지쳐가는 내 삶에 '이탈리아'라는 단어가 들어온 순간 2002년의 추억이 살아남과 동시에 벌써 로마 나보나 광장을 거니는 내 모습이 보였다.


그 곳이라면 여행하는 기분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201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해서 마냥 설렘만 있을 줄 알았던 내 해외생활은 2020년 코로나를 만나면서 기대랑 다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4년의 주재기간이 끝날무렵 러시아 발령이 나서 곧바로 러시아로 건너갔고 ‘머리속으로 그리던 소련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네?’ 하며 구 소련의 모습과 현대의 건물의 조화가 펼쳐진 모스크바가 눈에 좀 익는다 싶으니 전쟁이터졌고… 평탄할줄만 알았던 주재원 와이프의 일상이 버라이어티 해졌다. 7년 반의 주재원와이프 생활이 내게 알려준건


생존력, 기다림 그리고 독립심이었다.


어디서든 그냥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있어도 적응할수있는 능력, 외국인이라 혹은 beauracracy가 질질끄는 그 긴 시간을 참아내는 기다림과 인내심 그리고 죽이되든 밥이되든 이역만리 떨어져서 결국 누구의 도움도 받기어려운 상황에 혼자 이겨내야하는 독립심이었다… 결혼했다고 진정한 독립을 이뤘다기보다는 주재원생활하면서 독립을 한 그런기분이었다.


어떻게든 해낼거 같은 이 세가지를 안고 나는 딸이랑 둘이 나의 인생 2막을 준비하기위해 캐나다 알버타로

향했고, 들판의 소떼들… 유채밭, 밀밭이 끝없이

펼쳐진 이 곳에서 마흔 전에 다시 대학 학부로 편입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