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찌질한 이야기

문창과 졸업생의 직장생활 적응기 19

by 노루

이번 화는 내가 얼마나, 어디까지 찌질해졌는지를 밝히는 화나 다름이 없는데, 이 즈음의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면접을 봤다가도 소식이 없어 답답하고, 통장에는 잔액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있고, 아끼는 사람들도 있는데 거기에 돈 한 푼 못 쓰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미웠다.


친구들의 아무것도 아닌 말에도 쉽사리 마음이 긁혔다. 결혼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명품을 말하고 다이아를 말하는 그때에 쉽게 긁혔고, 비싼 옷에 긁혔다. 가방에 긁혔고 이사 소식에 긁혔다. 나는 못하는, 사실 원래 내 취향도 아니지만 내가 내 몫을 이루지 못해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긁혔다. 친구들은 그랬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내가 걸치고 다니는 게 곧 내 얼굴이라고. 그게 품위고 그게 경력이라고 그랬다. 나는 그냥 계속계속 작아지는 수밖에 없었다. 인터넷에서 4만 원 넘는 옷은 주저하는 나는, 결혼할 때에도 모든 것들을 가성비로 해결했던 나는, 아직 한통에 만 이천 원짜리 로션을 쓰는 나는, 그새 경력을 닦고 오랜 사회생활을 버텨낸 친구들에게는 그냥 할 말이 없었다.


친구들은 점점 나아지는데, 나는 자꾸 나아지려다가도 푹 고꾸라지고 다시 나아지려다가도 주저앉았다. 나는 그걸 문창과의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왜 취직에 도움도 안 되는 과를 갔어. 소설 써서 뭐 한다고 그걸 그렇게 속도 없이 좋아했어. 왜 아무 준비도 안 했어. 왜 세상 팔자 좋게 그걸 놀고만 있었어. 왜 그걸 좋아하고만 있었어. 그게 뭐라고. 글 쓰는 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도대체 그게 뭘 가졌다고 그렇게 마음을 놨어.


학창 시절에는 라디오를 열심히 들었었다. 세상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었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각자 어떤 고난을 이겨내고 있으며, 무엇이 그들의 위안이 되는지. 나도 한때는 사람들의 위안이 되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 사람들의 위로가 되고 어깨가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학교에서 항상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까. 근데 그게 다 뭔지, 시간이 지나니까 다시 기억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모두가 잠든 밤에 학과 친구들의 사생활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인스타를 몰래 찾아가 소식을 엿보기도 하고, 숨겨두었던 친구 목록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지금의 프로필사진을 찾아보기도 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잘 사는 친구들. 나랑 같이 문창과를 나왔어도 참 잘들 사는 친구들. 결국은 나만 빼고 다 잘 사는 친구들. 내 삶은 혼자 멈춰있었다. 나는 그냥 0인데 다른 친구들은 다 8까지 가 있는 것 같았다. SNS는 내 가장 빛나는 순간들을 올린다고, 알아도 그냥 상관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게 그게 다였다.


친구들이 만나자고 하면 안 만날 구실부터 생각했다. 거짓말은 차마 못하겠어서 이전의 사고들을 말했다. 나 목이 안 돌아가네. 나 엄마가 밥 먹자고 하네. 나 시댁에 가게 생겼네. 그냥 그런 변명만 늘었다. 약속을 취소하고 나면 세상 개운하고 가벼운 기분이 되었다. 그러고 나는 또 하루를 죽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를 죽였다. 근데 또 시기가 시기라고 자꾸 만나자는 친구들만 늘고 결혼하는 친구들만 늘었다. 나는 제일 초라한 모습으로 친구들을 만나고 제일 볼품없는 모습으로 친구들을 만났다. 아무리 꾸며도 그런 건 티가 났다. 없는 건 다 티가 났다. 나만 그걸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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