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통화
전 여친의 취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이 전화를 끊고 전 여친 집으로 당장 달려간다면 자연스럽게 우리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리가 잘해나갈 수 있을까? 헤어질 때 굳게 다짐하던 내 의지를 다시 떠올렸다. 내 상황은 그동안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난 전 여친에게 여전히 불안 요소이고, 그녀는 나 때문에 또 불안에 시달릴 게 뻔했다. 우리는 같은 이유로 스트레스를 받고 서로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 된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돼!
“너 많이 취했어. 얼른 잠이나 자!”
냉정하게 말하는 내게 전 여친은 투정을 부렸다.
“이럴 때 오빠가 와서 위로해 줄 수도 있는 거지”
“됐고, 얼른 씻고 자!”
토라진 전 여친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잘한 거라고 내 마음을 위로했다.
다음날, 술에 깬 그녀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헤어진 남친에 대해서 수다를 떠는 전 여친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잊을만하면 가끔 한 번씩 전화를 했다. 대화 주제는 주로 독서모임 사람들 뒷담화였다. 같은 책을 읽고 그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이 보이는데, 전 여친과 내가 캐치하는 사람의 성향이 대체로 비슷했다. 원래 서로 결이 잘 맞는 편이었기에 수다는 재밌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수다 파트너가 돼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전 여친이 만나자고 했다. 썸남이 생겼다고 했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5살 연하남이라고 했다. 그 사람은 거의 모솔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는데, 전부터 전 여친을 좋게 생각해 오다가 그녀가 솔로가 되었다는 소식에 용기를 낸 모양이었다. 거의 사귀기 직전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 난 만나는 사람 없냐고 물었다. 전 여친은 자기 연애사를 다 털어놓는데, 나도 얘기를 해주는 게 좋겠다 싶어 잠깐 만나는 친구가 있었다고 말했다. 전 여친은 내가 그 사람을 만났던 시기를 듣고는 꽤나 충격을 받았다. 헤어지고 같은 집에서 살고 있던 시기에 그 친구를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생각보다 너무 놀라는 것 같아서 괜히 얘기했나 싶었지만, 다시 잘 될 거 아닌 바에야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전 여친은 그 이후 몇 달 되지 않아서 5살 연하남과 결혼 준비를 시작했다. 전 여친도 나이가 40대 초반이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전 여친이 막상 결혼 준비를 한다는 소식을 들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마음에 미련 같은 건 전혀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싶었다. 한때 좋아했던... 아니 꽤나 사랑했던 사람을 잡지 못한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싱숭생숭한 마음은 전 여친도 마찬가지인지 꽤 자주 전화를 걸어와서 결혼 준비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차마 결혼식에는 갈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쿨하다고 하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결혼은 축하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축의금은 해야겠다 싶었다. 얼마를 해야 되지? 난 여전히 재정적으로 힘든 처지였다. 그냥 보통 친구처럼 10만 원은 너무 쩨쩨해 보이고, 20만 원도 좀 적어 보이고... 내 입장에서는 꽤 큰 금액인 30만 원을 해야겠다 싶었다. 전 여친의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 계좌에 결혼식 당일날 30만 원을 보냈다. BGM으로는 성시경의 ‘한번 더 이별’이 깔렸다. 헤어진 연인과 심리적으로 완전히 이별하는 마음을 다룬 윤종신의 가사는 아주 심금을 울려댔다. 그래, 이제 정말 완전히 이별하는 거지. 잘 살아야 돼!!
결혼식 이틀 뒤에 전 여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신혼여행은 더 나중에 간다고 했다.
전 여친의 목소리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무슨 축의금을 그렇게 많이 보냈어?”
“뭘 많이 보내. 더 많이 보내고 싶었는데... 잘 살아”
전 여친은 통장에 찍혀있는 축의금 액수를 보고 내 마음이 느껴져서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내 눈에서도 눈물이 찔끔 났다. 서로를 지금도 사랑하고 그래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닐 터였다. 한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던 때의 그리움 같은 것, 추억을 떠올리며 드는 감정 비슷한 거였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전 여친은 종종 전화를 걸어왔다. 난 먼저 전화를 건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전 여친은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여전히 솔로고 직장인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화 주제는 독서모임, 신혼생활, 남편 이야기 등 여러 가지였다. 남편이랑 사소한 걸로 부딪치는 이야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 공간에서 생활을 함께 해나가는 일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 일이다.
“오빠가 그래도 나 만날 때 많이 받아주었구나 싶어”
“그걸 이제야 안 거야?”
“미안해”
새로운 사람과 동거를 또 해보니, 느끼는 바가 있었던 것 같았다. 전 여친은 나와 헤어진 후 연애를 하고, 헤어지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 준비를 하고, 신혼 생활을 하면서 내면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진 것 같았다. 나는 예전 그대로 철없는 상태 그대로였지만.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겼다. 이제 결혼했으니 전화 오는 일은 줄어들겠다 싶었지만, 이게 웬걸. 점점 더 자주 전화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신혼 생활의 시행착오가 꽤나 심한 듯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펑펑 우는 목소리로 또 전화가 걸려왔다. 그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 적은 없었기에 놀라서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랑 대판 싸웠다고 했다.
“나 이혼할 거야. 이 사람이랑 못 살겠어”
또 왜 그러나 싶어, 전 여친의 하소연을 들어줬다. 난 전 여친이 정말 행복하게 잘 사는 걸 바랐기 때문에 이런 류의 전화를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네 남편 같은 사람 별로 없다며 남편을 옹호했다. 며칠이 지나 다시 전화가 왔다. 남편이랑은 화해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또 아무렇지 않게 수다를 떨었다.
아! 대체 왜 이러는 걸까? 미련 갖지 않고 잘 사는 내게 자꾸 전화하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전 여친은 보수적인 편이어서 나랑 바람 같은 것을 피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솔직히 이야기해야 했다.
“생각 좀 해봤는데... 너랑 나랑 이렇게 통화를 자주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왜?”
“네 남편한테 죄책감이 들어. 그래서 마음이 불편해”
“우리 남편도 내가 오빠랑 통화하는 거 알아”
응? 뭐라고? 몰래 전화하는 줄 알았는데, 남편이 알고 있다고 했다. 남편은 나랑 와이프가 전에 동거하던 사이인 것을 알고 있고, 나라는 사람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전 여친이 아무래도 내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말을 해놓았는데, 가끔 나랑 통화로 수다를 떠는 것도 괜찮다고 했단다.
“진짜 괜찮대?”
“응, 만약 내가 남편 몰래 전화한 거면 잘못된 거지만, 남편도 다 알아”
와! 나보다 쿨한 사람이 또 있었네.
그래서 전 여친은 지금처럼 내게 종종 전화할 거라고 했다. 둘 사이에 연애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없었기에 이렇게 수다 떠는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여친이 절친되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