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장
전 여친은 주로 월요일 점심때쯤 전화를 걸어왔다. 한 번 통화하면 보통 1시간은 했다. 대화는 대부분 독서모임 이야기로 시작했다. 금요일 독서모임을 같이 했을 때는 그때 모임이 어땠다는 이야기를 하고, 둘 중 한 명만 참석했을 때는 그 모임 어땠냐고 묻고는 했다. 독서모임 이야기가 끝나면은 서로의 근황 토크, 시댁 이야기, 나의 현재 컨디션 체크 등이 이어졌다. 몸은 괜찮으냐? 오빠는 아픈 전적이 있으니 계속 신경 써야 한다. 요새 만나는 사람은 없느냐? 등 주로 나를 걱정하는 말들이었다. 난 원래 전화로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전 여친과 나누는 수다는 즐거웠다. 가끔 이래도 되나? 싶기도 했지만, 남편도 괜찮다는데 굳이 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타인의 생각은 달랐다. 고향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친구들은 종종 물어왔다. 그 모임에 여러 번 같이 나간 적이 있어서 친구들도 전 여친의 존재를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만나던 그 친구 하고는 혹시 연락해?”
“응, 독서모임에서 계속 만나. 벌써 결혼도 했어”
친구들은 결혼한 전 여친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 것을 굉장히 신기하게 생각했다. 난 전 여친의 성향을 잘 알기에 이 사람이 나쁜 의도로 나한테 연락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지만, 친구들은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남편이 있는데도 너한테 전화를 한다고?”
난 그냥 동성친구한테 수다 떨기 위해 전화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해 보았지만, 친구들에게 설명하면 할수록 전 여친은 친구들에게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어갔다. 남편한테 충족되지 못한 부분을 전 남친인 너한테 푸는 거 아니냐. 너무 이기적이다. 가스라이팅이다. 별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거 아니라고 변명해 보았지만, 객관적인 상황만 따질 때는 친구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결국 난 전 여친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하지 않기 시작했다. 브루스 윌리스나 데미 무어 같은 할리우드 커플도 아니고, 우리 둘 사이를 그들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고.
사실 그때만 해도 ‘나한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기면 이런 통화도 곧 끝나겠지’라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코로나 기간과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어느새 40대 중반이 되어있었다. 무슨 모임을 나가도 그곳에 있던 여성이 나를 대하는 시선에 관심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맞다. 나는 그들에게 그냥 40대 노총각 아재였던 것이다. 투병 기간 동안 끊었던 탈모약 때문에 머리도 휑해지고, 흰머리도 늘어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혼자서 50대를 맞이할 것 같다는 위기감이 생겼다. 탈모약도 다시 먹기 시작했고, 꼬박꼬박 염색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래도 예전처럼 썸이 잘 생기지는 않았다. 내 주변 여성들도 모두 내 또래이거나 30대 후반이었다. 그들도 급한 건 마찬가지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은 당연했다. 결혼할 준비가 된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만날 이유가 없었고, 그런 면에서 난 결격 사유 충만한 사람이었다.
결국 답은 뻔했다. 일적으로 성공해야만 연애고, 결혼이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영화계나 드라마 업계에서는 갈수록 안 좋은 소리만 들리고, 난 대체 어떤 일을 해 먹고살아야 되나?라는 근본적인 의문에 빠졌다. 아무리 안 좋은 업계라도 잘 나가는 사람을 늘 있기 마련이기에, 사실 그런 고민도 모두 핑계에 불과했다. 좋은 시나리오를 써내면 결국 기회가 올 수밖에 없겠지만, 나름 열심히 하는데도 쉽게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썸’이라는 걸 타본 지도 참 오래되었다. 연애 세포가 완전 죽은 것까지는 아니고, 잠자고 있는 상태랄까. 시도를 해봐야 잘 안될 거라는 생각이 강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혼자인 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전 여친과의 통화는 일종의 루틴이 되었다. 주당 1~2회씩 꾸준히 통화를 하는 루틴. 그 루틴이 2년째 지속되어 어느새 2025년이 되었다.
새해에는 전 여친과 통화를 하는 루틴 말고, 글을 꼬박꼬박 쓰는 루틴을 만들어보고 싶어 글쓰기 모임을 하기로 결심했다. 어떻게든 떨어진 에너지를 다시 끌어올려야 했다. 브런치를 재개한 것도 그런 취지의 일환이다. 글쓰기 모임은 주말을 제외한 평일에 모임장이 제시하는 글감으로 글을 쓰는 온라인 모임이다. 매일같이 다른 주제로 글을 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름 고민해서 글을 써보아도 문장이 맘에 안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문장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럽게 필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장이 좋은 작가가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제일 먼저 김애란이 떠올랐고, ‘비행운’에 있는 작품을 필사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손으로 필사를 하려고 하니 연습장이 필요했다. 그러다가 책장에서 전 여친의 연습장을 발견했다. 나와 동거를 할 때 쓰던 연습장이었는데, 이사할 때 놓고 간 것이었다. 전 여친이 영업할 때 메모를 하던 연습장이라 일 관련 메모들이 낙서처럼 적혀있었다.
스트레스 주는 요인
1. 일 5
2. 오빠와의 관계 3+1
날 이해해주지 못하는 부분
가슴이 답답함
3. 술, 건강 3
4. 일 (취소에 대한 두려움) 1
5. 불안, 걱정 (습관화된) 5
성과, 경쟁
2022년 계획
매달 시상식 10개 이상
잡지 3개 이상
한 달 600만 원 이상
300만 원 이상 저축
이 메모에서는 한 달에 얼마나 벌어야 한다는 계획이 쓰여있었다. 그때 당시 나는 백수이던 상황이었으니,
자기가 더 많이 벌어야 된다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미래!
1. 집이 좀 더 크고 오빠 공간과 내 공간이 분리되어 있는 공간, 테라스가 있었으면
(거실이 크고, 드레스룸, 서재, 내가 작업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으면)
2. 일에 대한 발전, 전문화. 내 일이 더 커지고 자리가 잡혀서 오빠랑 같이 일할 수 있는 구조...
당시 집이 좁아서 서로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둘 다 집에 있었으니 나는 전 여친이 영업하는 전화 통화를 계속 들어야 해서 괴로웠고, 전 여친은 내가 영화 볼 때 사운드 때문에 힘들어했다. 난 공부한답시고 영화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보았으니, 소리에 예민한 전 여친이 굉장히 힘들었을 게 분명하다. 그때 당시엔 난 전 여친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
나와 헤어지기 직전에 쓰던 연습장이라 나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었구나 싶었다. 내가 전 여친에게 스트레스 요인이었다는 부분은 정말 마음이 아팠다. 시간이 흘러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때가 오자 모든 게 후회가 되었다. 내가 정말 전 여친 탓만 하면서 이기적으로 내 생각만 했구나 싶었다. 전 여친이 이렇게 스트레스받고 있는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노력했을 텐데.
연습장을 발견하고 몇 주 뒤에 전 여친과의 통화에서 연습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너 스트레스 많이 받았었네. 미안해.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어”
전 여친은 그때 당시 정말 힘들었었다고 했다. 그러니 이별을 선택했겠지만.
그때 당시의 감정들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풀었다. 이것도 다 시간이 지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라는 명제를 한국인들은 굳건히 믿는 것 같다. 나도 이전에는 그 말을 완전히 믿었었지만, 전 여친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 친구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누군가는 둘 중 한 명이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고 있다고, 그래서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는 거라고 말하지만... 나와 전 여친 사이의 관계는 그건 아닌 것 같다. 서로 인간적인 면을 좋아하는 것은 맞다. 나도 그렇고 전 여친도 그렇고, 서로의 인생을 누구보다 응원하는 사이. 그렇다고 다시 남녀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서로 원하지 않는다.
그래도 언젠가는 루틴이 되어버린 전화 통화를 그만둬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아마 나한테 새 연인이 생길 때가 바로 그때일 테지만,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테니 우리 사이의 통화는 한동안 유지될 것 같다.
코로나 시절 투병하는 동안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 브런치를 시작했는데, 그때 느꼈던 감정들을 어느 정도 쏟아낸 것 같다. 글로 정리하고 보니 내 인생의 한 챕터가 마무리된 느낌이랄까.
이 글들을 투병기라고 한다면 마지막 챕터이길 바라고 있다.
이 글들을 연애물이라고 한다면 이 챕터가 어쩌면 최종장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중간 챕터라서 뒷부분이 새롭게 이어질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부디 최종장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앞으로 이 브런치에는 일상을 살아가면서 느끼는 단상이나 짧은 소설 같은 것을 올릴 생각이다.
누가 읽어줄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올리면 내 글쓰기 실력도 조금씩 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