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5일차, 말라카(Melaka)에 가다. 2
기대하지 않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걸까?
그새 더위를 먹은 걸까?
아주 잠시 잠이 들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꽤 잔 것 같다.
약간의 두통에 멍한 기분이다.
침대에서 내려온 나는 와이파이를 연결해 말라카에 대한 정보를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믈라카?
멜라카?
말라카?
무엇이 정확한 발음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이 우선이다.
구글 지도를 열어 주변을 살폈다.
지도 방위 상 호텔의 동쪽으로 뭔가 많은 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식당이 많은 것으로 보아 가면 뭐가 있어도 있을 것 같았다.
가는 길을 대충 숙지하고 호텔을 나섰는데 습한 대기가 나를 누르기 시작했다.
지도를 보며 어느 길로 걸어갈지 구상을 했었는데 이런 날씨에 그런 생각을 했던 걸까?
아무튼 계획한 것이니 터벅터벅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나마 배낭을 메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늦은 오후가 되면 기온이 내려가겠지 싶어 한숨 자고 나온 건데 그래도 더운 건 마찬가지였다.
무려 왕복 6차선이나 되는 도로를 건너는데 금발의 중년 서양인 한 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주 능숙하게 무단 횡단하는 것이 보였다.
그를 보니 무단횡단에 양심을 가책을 느끼던 것이 상쇄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주변 어디를 봐도 횡단보도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을 관통하다 보니 꽤 큰 규모의 공원이 있었다.
공원 주변 나무에는 두리안 같은 열매가 달린 나무도 보였다.
몇 차례의 무단횡단을 하며 10여 분 정도 걸었을까?
한적한 마을 길가에 존재할 이유가 전혀 있을 것 같지도 않은 위치에 코코넛 음료를 파는 가판대가 보였다.
딱히 목이 마른 건 아니었지만 발걸음은 당연한 듯이 그쪽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제멋대로 자른 합판 조각에다 성의 없이 쓴 가격표를 살피는데 가판대 뒤편 주택에서 한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판대 상점 주인인 듯했다.
코코넛 열매 그대로 줄까? 담아 줄까? 하는 질문에 나는 포장을 부탁했다.
그는 옆 아이스박스를 열더니 불투명한 코코넛 과즙이 담긴 비닐봉지 하나를 꺼내 얇은 비닐끈으로 매듭을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
약 10초 정도 현란한 손놀림은 비닐을 단단히 묶고 손잡이까지 만들었다.
게다가 언제 꽂았는지 비닐 빨대까지 꽂혀 있었다.
그에게서 코코넛 음료를 받아 들고 가던 길로 발길을 옮기는데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 세계적으로 비닐 사용을 줄이자는 추세이고 나 역시 동참하고자 가급적 1회 용품 이용을 꺼리는 편인데 원치 않게 이런 걸 들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라니.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푹푹 찌는 기온에 그마저도 금세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시 5분 정도 걸었을까,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당장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작은 시장이었다.
말라카 마을에 자연스럽게 조성된 비공식 시장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사탕수수 즙을 짜서 파는 부부도 있었는데 코코넛 음료만 아니었어도 샀을 것 같다.
시장은 기껏 100미터 정도로 매우 짧았다.
시장을 벗어날 즘 쪽쪽 빨던 코코넛 음료가 바닥나면서 코코넛 과육만 남았다.
누가 뭐래도 코코넛의 핵심이라고 해도 되는 과육.
나는 비닐을 뜯어 쫄깃하면서 고소한 과육을 음미했다.
10분 정도를 걷자 구글 지도에서 보았던 말라카의 박물관 등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30분 이상 걸어온 듯하다.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니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다시 구글 지도를 열어 주변을 검색했다.
어지러운 골목 사이로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일이 나름 재미있는 일이긴 한데 습한 더위가 나를 지치게 했다.
스마트폰 없을 때 종이 지도를 펴고 주변을 살피며 다니던 기억이 났다.
10년 전 말레이시아를 찾았을 땐 아이폰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당시 내 손엔 아이팟이 있었고 와이파이도 엄청 느려서 호텔에서조차 사용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그 덕에 그나마 편하게 다니기는 했던 것 같다.
노트북을 가져오지 않았어도 간단한 이메일 정도는 작성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불과 10년 사이에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이다.
드디어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참은 게 용하다.
오늘은 뭘 먹을까 고민하던 중 한적한 말레이시아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식사시간이 한참 늦긴 했어도 손님이 너무 없다 싶었다.
가족이 함께 운영하는 곳인 듯했는데 정통 말레이시아 로컬푸드 전문점인 것 같았다.
역시 짜다. ㅠㅠ
생선조림 같은 음식인데 짜도 너무 짜다.
그렇게 배가 고팠어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남기려 했지만 사실은 다 먹었다.
후식은 코코넛 셰이크로.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맥주조차 마시지 않기 때문에 음료가 상당히 발달되어 있다.
모든 말레이시아 식당에서 음식과 음료를 따로 주문한다.
가격적인 부분을 고려하면 어지간한 소득이 없으면 괜찮은 식당에서 외식을 하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
한참을 걷다 보니 강이 나타났다.
이걸 과연 강이라고 해야 하나 싶었지만 지도에는 Melaka River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 강이다.
우리가 한강처럼 폭이 넓은 곳만 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고정관념이지 싶었다.
오늘은 말라카 관광지 탐색 정도로 마치고 다음날 본격적인 투어에 나설 생각이었기에 그냥 주변만 훑어보고 지나치기로 했다.
구글 지도를 보니 마침 비즈니스 파트너가 꼭 한번 들러보라던 곳이 근처에 있었다.
당연히 그곳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권했을까?
바바&뇨냐 전통 박물관이란다.
영문으로는 Baba and Nyonya Heritage Museum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말레이시아로 이주해 온 중국인 왕족? 의 후손들이 운영하는 가족사 박물관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유료 박물관이며 유료로 설명을 영어로 들을 수 있으나 나는 혼자 감상하기로 했다.
사실상 중국인이 아니라면 딱히 감흥이 없는 곳이지만 말레이시아의 개화기 역사 속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곳인 건 사실인 듯했다.
말레이시아 역사에 딱히 호기심이 없던 지라 무겁지도 가볍지도 흥미롭지도 않아 후다닥 내부를 살피고 나왔다.
건물 하나가 박물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박물관 로비에서만 사진 촬영이 허가되고 내부에서는 불가다.
바바 앤 뇨냐 박물관을 빠져나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말레이시아에는 유난히 H&M SPA 매장이 많다.
특히 말라카의 최고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네덜란드 광장 주변에도 매장이 있다.
말라카 강 주변으로는 게스트하우스, 카페, 식당이 즐비하다.
강을 끼고 양쪽으로 건물들이 빽빽한데 시간대 별로 햇볕을 피해 다녀야 할 것 같았다.
말레이시아는 확실히 화교 문화와 말레이시아 전통문화가 어지럽게 섞여 색깔 자체가 퇴색되어 보였다.
특히 네덜란드 광장이라는 곳이 있을 정도로 유럽의 문화까지 어지럽게 섞인 느낌이 들었다.
폭이 좁은 강변을 따라 한 블록 정도를 걸었다.
강을 따라 관광객을 잔뜩 실은 보트가 수시로 지나갔다.
처음 몇 대 정도는 약간의 이색적인 느낌이 들었지만 금세 퇴색되어 버리고 말았다.
좌로 우로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강변엔 어울리는 듯 어지러운 듯 카페가 즐비했다.
나는 더위를 피해 모인 한 무리의 사람들 속에 섞여 들었다.
역시 맥주가 최고다.
제주도에서 환상 자전거길 당일치기 종주를 할 땐 맥주가 당을 채우는 역할을 했었던 기억이 난다.
7월 말경 한창 여름 땡볕에 그런 짓을 왜 했나 싶었는데 말레이시아에 와서 말라카를 무작정 도보로 여행하는 지금 역시 마찬가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곳도 있더라.
나름 포토존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난 딱히 함께 사진을 찍을 사람도 없고 해서 타인 모습을 담아 보았다.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 마무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작정했다.
이번엔 바닷가 길로 걷는 거다.
도보여행의 장점은 내 맘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 다니는 여행의 장점 역시 누구와도 의논할 필요도 없고 타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힘이 들면 나 자신과의 타협에 있어 협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다.
나는 더위에 맞서며 꿋꿋하게 걷는다.
바다 쪽으로 가니 강폭이 점점 넓어졌다.
괜찮은 리조트도 보였다.
숙소를 잘못 잡았다는 걸 절감했다.
Casa del Rio (까사 델 리오)
이 곳은 말라카에서도 손꼽히는 숙소라고 한다.
다음에 또 오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다시 찾게 된다면 까사 델 리오에서 숙박하리라.
지도만 믿고 그냥 걸었다.
바다 냄새가 슬슬 나기 시작했다.
멀리 바다가 보였다.
기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실망하고 말았다.
페낭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딱히 다를 것 없는 그냥 바닷가.
그런데 이 한적한 바닷가 도로가에는 푸드트럭이 영업하고 있었다.
가족단위로 많은 사람들이 그늘에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연인들도 제법 보였다.
주말이라 그런가?
말라카 사람들은 갈 곳이 별로 없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바닷가는 지저분했다.
관리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멀리 한참 개발 중인 모습도 보였다.
해는 저물어 가는데 너무 일찍 돌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후회도 됐다.
급히 인터넷을 뒤적거려 보니 근처에 바닷가 모스크에 관한 포스팅이 있었다.
걸어서 갈 거리는 아니었다.
너무 늦은 정보라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지만 과연 그 기회가 올까 싶었다.
바닷가 길 끝에는 공사현장 입구 근처를 끝으로 도로가 막혀 있었다.
호텔까지는 불과 5분.
아침도 굶고, 점심은 시원찮게 먹어서 그런지 벌써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빨리 들어가서 씻고 기어 나와 뭐라도 먹어야 할 참인 것이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찬 물로 샤워했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하나를 해결하면 하나의 문제가 나타난다.
역시 잠시 잊었던 허기.
당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식당들을 기웃거리며 어떤 걸 먹을지 고민했다.
역시 줄을 서는 집엔 가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은 독주를 마시고 싶은데 말레이시아 음식점에서는 맥주 한 캔 사 마시는 것도 어렵다.
이번엔 중국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해야 한다.
간신히 눈에 들어오는 식당 하나를 찾아냈다.
하지만 이 집은 패스.
왜 그랬는지 후회하게 됐지만.
사진은 그럴듯한데 다들 너무 짜다.
메뉴판을 뒤져봐도 독주는 보이지 않았다.
이거 야단 났다 싶었다.
오늘의 목표는 독주인데.
영어를 쓰니 직원들도 야단 났다.
이리저리 분주하더니 사장인 듯싶은 중년 남자가 다가왔다.
그 역시 영어가 션찮다.
내 영어 수준이 들통 날 일이 없다는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 소통할 수 없는 영어.
짧은 고민 중에 중국어를 우리말처럼 하는 분에게서 주워들은 중국어가 기억났다.
빠이지우(백주) !!!
화이팅!!!!!!!!
아자!!!!!!!!
드디어 그가 알아들었다.
그는 프런트 데스크 아래를 뒤적거리더니 병 하나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혹시 이런 걸 원하느냐는 제스처였다.
그 역시 내 표정을 읽었을 것이다.
보았노라. 찾았노라.
42도짜리 빠이지우.
가격은 너무 착하다. ㅎㅎ
1만 원도 안 하는 가격.
술은 꽤 괜찮은 듯했다.
1병을 다 마셨을까?
절대로...
30% 정도는 남아서 숙소로 가져갔는데 역시 마시지는 못했다.
더우니 술도 잘 안 들어가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