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부터 잘 하자!!!!!!

by 루파고

오늘 모 증권사 대표와 미팅이 있었다. 나는 그저 졸개에 불과했지만 매우 불쾌한 하루였다.


대표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고 우리가 그의 업무실에 들어선 후에야 구두로 갈아 신었다. 자리를 빠져나온 후에야 들었지만 직원이 마중 나온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런 모습에서부터 황당함을 느껴야만 했다. 손님 접하는 기본 응대조차 예의에 어긋나는 모습에 첫인상부터 깎아 먹은 것이다. 그 후에 벌어진 그의 태도는 보나 마나 했던 것이다. 그는 우리를 매우 하찮게 본 것이 분명했다. 첫 질문부터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 자리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르는 그가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더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는 걸 느꼈고 자리를 빠져 나왔다.

당연히 증권사 대표는 그의 윗분에게 꾸중을 들었고 되지도 않는 변명으로 위기를 모면하려 들었다는 후문을 전해 들었다. 어찌나 황당한 변명인지 피식 웃고 말았지만 더는 그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미팅 자리에서 나는 참다못해 화를 내려했지만 우리 대표가 제지시켰다. 물론 나도 입장이 있어 그 수모를 견뎌내야 했다. 만약 내가 감정을 누르지 못했다면 그나 나나 다를 바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오늘 오전 나의 콘셉트는 비관이었다. 나의 초라한 행색 때문이었을까? 나는 사회 초년생부터 길을 잘못 접어들어 정장을 입어본 적이 없다. 이 년 전 해외 출장 때 장만하고도 한 번 입어본 적 없는 하계용 정장 한 벌을 제외하면 변변한 정장 한 벌 없는 난 오늘도 역시 캐주얼 복장으로 미팅에 참여했었다. 아마도 상대는 나 때문에 우리를 하찮게 보았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인 거다. 기본적인 매너가 부족하다고 손가락질해도 할 말이 없지만 난 지금껏 어떤 기업의 누구를 만나도 이렇게 살아왔다. 상대가 나의 겉모습을 보고 나를 판단하겠다면야 명품으로 치장하면 그뿐이지만 나의 겉모습 때문에 나를 만나는 게 아니라는 같잖은 나만의 억지 논리인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똥고집인 거다. 아무튼 오늘 우리 대표가 경험한 수모는 나 때문인 것 같다는 비탄에 빠져들게 했다. 그게 하나의 문제점으로 작용했다면 나로 인해 우리 대표의 위신도 깎인 셈이니까.


오만하고 경솔한 모습에 일개 부서장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증권사 대표라는 자리가 위태롭게 보였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 직위의 위엄에 스스로 자존감을 올려버린 그의 앞길은 보나 마나 뻔했다. 외국에서 국가 수장은 물론 국회의원, 장관, 장성 등에게 국빈 대접을 받아 왔던 우리 대표는 코로나 때문에 모처럼 국내 비즈니스를 하며 한국 사회를 새롭게 경험하게 됐는데 최근 이런 일들로 좋지 않은 많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오늘 일로 마침 나의 머릿속을 스치는 누군가가 있었다.


어떤 자리에 놓으면 빛이 나는 사람이 있고 패색이 짙어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자리는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리가 사람의 껍질을 벗겨내 본질을 드러내게 만들기도 한다. 대표라는 자리는 기업의 얼굴이다. 그는 이미 그가 평생을 그 자리에 있어도 해낼 수 없는 기업의 수익을 위태롭게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만약 그가 오너였더라면 그 같은 행동을 했을까 싶었다. 언젠가 선배님이 해주신 말이 기억났다. 주인의식을 가지라는 말을 잘못 알아듣고 주인 행세를 하려는 직원들이 있다고 말이다. 주인의식이 있는 주인 행세라면 더없이 반길 일이지만 그런 사람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하찮아 보이는 사람도 하찮게 보지 말라. 이쑤시개 하나로도 사람을 해할 수 있는 게 사람이라고.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우리 쪽 다른 대표가 또 다른 모 증권사 누구와 자리를 하게 됐는데 우리와 업무를 보는 모 자산운용사를 헐뜯는 소리를 했다. 그게 우리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 증권사도 손가락에 꼽히는 기업이고 모 자산운용사도 굴지의 기업이다. 우린 발설한 사람이 누군지, 모 증권사기 어딘지, 모 자산운용사가 어딘지도 안다.

조상님들 하신 말씀들 중 틀린 게 없다고들 한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며,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모름지기 사람은 항상 입 관리를 잘해야 하며 처신을 잘해야 한다. 자기계발서를 아무리 읽어도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자기 그릇을 넘어 스스로 높여버린 자존감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량이라는 단어가 있다. 나의 도량을 알 때 정말 괜찮은 사람인 거다. 누구나 항시 스스로를 누르고 산다. 절대 관대해선 안 될 녀석은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오늘 비관에 빠진 나를 어찌 구출할까 싶었는데 역시 한잔의 술과 몇 줄의 글쓰기로 갈무리해 본다.


새벽 4시 30분에...

오늘의 생각 정리, 나부터 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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