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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Jul 29. 2021

3박 5일, 제주도 집에서 짧은 여름휴가 5일차

제주도에서쫓겨나다

전날의 야외 술자리는 나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최고의 만족을 주었다. 분위기가 좋으니 술이 술술 들어갔을 거다.

7시에 눈을 뜨고 이리저리 뒹굴뒹굴 굴러다니다 게으름 피우는 걸 포기하고 일어났다. 마지막 날 일정을 고민하고 있는데 전날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차를 가지러 가야만 했다. 어쨌거나 휴가 마지막 날 뭐라도 해야만 했으니 차를 집 앞에 끌어다 놔야만 했다.

창고에서 엄마 자전거를 꺼내 날라리 라이더 복장을 하고 페달을 밟았다. 골목에선 몰랐는데 2차선 도로를 만나니 맞바람이 만만치 않았다. 전날보다 바람이 강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하필이면 정동풍이 불었다. 4차선 도로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달릴 만했는데 맞바람이 예사 수준이 아니었다.

페달을 밟아도 속도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목적지가 멀지 않았고 급한 일도 없었기에 20km/h도 안 되는 속도에 만족할 수 있었다. 로드바이크를 타고 있었다면 맞바람도 거침없이 부딪쳐 달렸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가민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에 스마트폰의 스트라바 앱을 켜고 달렸다. 도착하고 보니 기껏 3km 거리인데 느낌은 10km였다. 맞바람의 효과다.




수없이 촬영한 포인트이지만 어김없이 사진은 남겨보기로 했다. 왠지 그냥 지나가면 아쉬운 느낌이랄까? 사진을 촬영하며 보니 문자메시지가 들어와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일요일 아침부터 웬 문자람?

메시지를 열었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태풍 영향'이라는 글자를 접하는 순간 뇌리를 스치는 익숙한 느낌이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설마 했던 일이 벌어진 거다. 어쩐지 전날 밤의 기후가 예사롭지 않다 했다. 문제는 밤 9시 30분 배는 결항되고 당일 출도 하려면 무조건 12시 배를 타야만 한다는 것이다. 성산에서 제주항까지는 빨리 달려도 40분. 집에 가서 짐 챙기고 엄마가 주신다던 농산물도 차에 실어야 한다. 나는 잽싸게 전화를 걸어 짐을 챙기라는 메시지를 전한 후 자전거를 차에 싣고 총알처럼 집으로 튀어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남원의 현지인에게도 예기치 않게 빨리 올라가게 됐다는 문자를 전송했다.

집에 도착하자 서둘러 짐을 챙기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아침에 샤워를 하지 않으면 뭔가 불편한 나는 후다닥 초스피드로 샤워를 한 후 서울로 돌아갈 준비를 마쳤다. 그 사이 해운사에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아마 확인 전화였을 거다. 잠시 후 다시 연락이 와서 내 의견을 묻기에 당연히 12시 배로 나가는 걸로 결정을 했는데 만약 어물쩡거렸다면 태풍이 지나간 후에나 올라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완도행 배가 아니라 여수행 배를 타야 한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는 5시간 30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차를 운전하는 거리는 1시간 정도 줄어들긴 했지만 만만한 시간은 아니었다. 바다에서의 거리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는데 결정을 짓기 꽤 곤란한 개념이었다.

사진이 없지만 단호박 한 상자, 양파와 감자 한 상자, 반찬류 한 상자와 기타 여러 가지 엄마표 식량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 서둘러 집을 나섰는데 남원 현지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로 실려 보낼 야채가 있다고 했었는데 가는 길에 실려 보낼 테니 중간쯤 보자는 거였다. 번영로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여유롭게 달릴 수 있었다. 스티로폼 냉장용 상자 두 개를 차에 싣고 제주항으로 달리는데 의외로 시간이 남아 배스킨라빈스에서 아이스크림도 사 먹을 수 있었다.



카페리는 차를 먼저 싣고 사람이 탄다. 사진에 보이는 층간 슬로프가 나중에 나를 곤혹스럽게 했는데 차를 실을 때와 내릴 때 슬로프 방향이 바뀐다. 운항 중일 땐 슬로프는 위로 올려져 평지가 된다. 차 찾을 때 이런 걸 안내해주면 좋으련만 크지도 않은 배 안에서 차 찾느라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른다.

만약 해운사 통화 시 어물쩡거렸다면 서울로 갈 수 없었다고 한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매표소 직원과 다투는 형국이 벌어진 꼴을 보니 말이다. 천재지변이고, 예약을 걸지 않은 본인들의 문제를 해운사 직원에게 따져서 될 일은 아니지 않나?



의외로 분주하다. 매표소 안내판을 보니 12시 배편 이후로는 모두 결항 처리됐다. 거의 제주 탈출 모드인 셈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면세점도 운영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면세점에서 담배를 사 가지고 가겠다고 다짐을 하던 누구는 불쌍하게 됐다. ㅎㅎ



완도행 배는 원래 2등석을 예약했었는데 여수행 배는 3등석을 살 수밖에 없었다. 배가 만실이나 마찬가지였던 상황이다. 아무튼 무사히 배에 탔으니 이젠 여름휴가는 종료 시점을 맞이했다. 아듀! 제주~

다음에 다시 내려오면 벵에돔 타작을 하리라는 다짐으로~ ㅎㅎ

태풍전야 느낌은 아닌데 왠지 그런 느낌의 하늘이었다. 고요한 바다, 어두침침한 하늘, 곧 뭐라도 쏟아질 것 같은 묘한 분위기.



누워서 잘 수 있는 3등석 객실에 갔다가 자리를 6층 로비로 옮겼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소파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리가 앉을 수 있는 3인용 테이블이 남아 있었다. 운이 좋았던 거다. 난 가방에서 노트북과 갤럭시탭을 꺼내 놓고 안경도 벗어 테이블에 올린 후 최대한 릴랙스 한 자세를 잡았다. 하지만 소파는 불편했고 잠을 청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도에서 제주로 내려오는 배편에선 의자가 이것보다 불편해 잠을 잘 수도 없었다. 게다가 밤새 운전하고 갈 필요도 없어졌다. 여수에 도착하면 6시 정도 될 것이고 저녁밥 먹고 천천히 운전해서 올라가면 12시 정도엔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예매를 새로 한 영수증을 살펴봤다. 가격이 조금 저렴해 진 듯했지만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차량과 여객은 승선권을 따로 지불해야 한다.



배 안에는 매점도 있다. 이렇게 컵라면도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인천에서 제주로 가는 세월호가 있었을 땐 12시간을 가도 편했는데 새로운 선박이 건조되었음에도 아직까지 허가를 내주지 않는 정부는 대체 뭔 생각인지 모르겠다. 가방에서 티슈를 찾아보니 대한항공 라운지에서 가져온 게 있었다. 배에서 대한항공이라니 웃긴 조합 같았다.



제주를 떠나 한참을 달리자 하늘이 맑게 개어 있었다. 좁아터진 대한민국 땅덩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싶다. 하긴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하남까지만 가도 온도가 다른데 이 정도 거리면 달라도 할 말은 없다.



여수까지 5시간 30분 걸린다던 예정과는 달리 무려 6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려운 시간이다. 예전엔 좁아터진 비행기를 타고 어떻게 해외여행을 다녔나 모르겠다. 여수엑스포가 자리 잡은 해안을 보며 엑스포 공사 때 방문한 후로 거의 10년 만에 찾은 것 같았다. 그새 여수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당시 여수엑스포 단장님 덕에 이틀 동안 여수를 헤집고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하선 준비를 하라는 말에 차를 찾으러 가서 배를 두 바퀴나 돌았다. 차를 찾을 수가 없었다. ㅎㅎ

이렇게 슬로프가 오르내리는 줄 누가 알았겠나?



유명하다는 여수의 명동게장에 가서 갈치+게장을 주문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식도락가인 내 입장에서 이 정도 게장은 흔하디 흔하다. 디스하려고 하는 건 아니지만 정말 왜 유명한지 모르겠다. ㅎㅎ 갈치조림은 말할 것도 없고. 갓김치도 서울에서 주문해 먹는 것과 비교해도 수준이 떨어지고 말이다. 적어도 여수에서 먹으면 더 맛있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딱 하나, 갓으로 담근 물김치 하난 이색적인 맛이었다. 명동게장을 오래전에 다녀왔다던 동행자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유명세를 탄 후로 음식에 대한 정성이 빠져버린 거다. 어쨌거나 여수에서 여수의 유명 맛집엔 들렀다 왔다. 만족도가 높았다면 사진을 찍고 나의 맛집 리스트에 올릴 만한데 그럴 만한 가치는 없었던 것 같다. 재밌는 건 대기실이 따로 있다는 거다. 얼마나 사람이 많으면... 아무튼 연예인 마케팅으로 성공한 식당인 것으로~



서울로 향하는 길은 여름휴가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사진으로 제대로 남길 순 없었지만 저녁나절 달리는 도로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황홀경 속에 운전하는 내내 제주에선 느끼지 못했던 감흥이 있었던 것 같다. 여수 밤바다가 그렇게도 아름답다고 하던데, 미처 그걸 느끼지 못하고 올라오기 급급했던 게 후회스러웠다. 왜 여유롭지 못했을까? 서울로 향하는 길이 뭐가 그리 급하다고... 우연히 방문하게 된 여수를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 채 핸들을 잡았던 나 자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여수는 내게 멋진 풍광으로 배웅을 했고 난 겸손히 여수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아듀~ 제주, 아듀~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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