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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Jul 28. 2021

3박 5일, 제주도 집에서 짧은 여름휴가 4일차

벵에돔은 나를싫어하나 봐!

술을 마시나 안 마시나 몸이 고단한 건 같다. 휴가를 온 건지 훈련을 온 건지 헷갈리는 상황이다. 그나마 체력이 좋아 다행이지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을 견디는 게 어지간한 사람들에겐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9시 정도 됐을까? 느지막이 일어나 엄마가 해주신 톳밥을 흡입해 배를 채웠다. 어떻게 보면 배를 채웠다기보다는 에너지를 공급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낚시 포인트 탐색 차 내가 좋아하는 벵에돔 포인트를 둘러보았다. 마침 바람도 강한지라 딱히 괜찮을 성싶은 포인트가 별로 없을 걸 알면서도 괜한 희망을 품었던 거다. 섭지코지 포인트는 높은 파도로 물보라가 치고 있었다. 낚시는 틀린 거다. 이왕 나선 김에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취지로 기념사진을 촬영해 주고... 물론 내 사진은 없다.



이번엔 남원 쪽을 향해 달렸다. 바람 방향으로 보아 이쪽은 상황이 더 심각했다. 태풍의 영향권에 든 것도 아닌데, 겨우 이 정도 간접 영향으로 제주도 바다가 뒤집어졌으니 낚시는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틀 동안 벵에돔 얼굴도 못 본 게 억울해서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차를 돌려 제주시로 향했다. 머릿속에 스치는 포인트가 있었던 거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조천에 있는 북촌포구다. 여긴 정말 대물 잘 나오는 포인트인데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하긴 늦게 오면 언제나 자리가 없는 곳이긴 했다. 이 포인트는 바람 방향에 따라 낚시 던지는 방향을 돌려 잡을 수 있어서 좋은 명당자리다. 바람이 강하긴 했지만 낚시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거란 판단에 자리를 결정했다. 해 질 무렵, 해창 때는 벵에돔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점을 먹었으니 점저로 한 끼 때우기로 했다. 우리 때문에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시던 엄마가 제때 식사를 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 그래서 계획했던 대로 한우 1++ 채끝 1.5kg을 꺼내 굽기 시작했다. 혼자 계시면 아무리 좋은 고기를 갖다 드려도 잘 안 해 드시니 직접 궈 드리는 게 최고다.

당연히 1.5~2센티 정도 되는 두께로 썰어낸 한우를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올린다. 유막 코팅하고 강한 불에 표면을 익히며 후추를 갈아 뿌린다. 뒷면도 같은 순서다. 앞뒤로 적당하게 익히며 육즙이 새어 나오지 못하게 막아 제대로 된 소고기 맛을 유지하도록 한다.



우린 전날 실컷 먹었으니 대부분 엄마에게 양보했다. 은근히 잘 드시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효도라는 걸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터라, 이런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효도 같은 효도를 해볼 날이 있을 텐데 말이다.





식사를 마치고 해창 시간 전에 북촌포구에 도착했다. 남원에서 출발한 현지인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새로 산 밑밥을 개어 놓고, 미끼도 준비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벵에야 제발 물어라. 하지만 벵에는커녕 잡어들만 드글거리는 수면을 보며 들뜬 마음은 식어가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로 보이는 몇 명의 남자들이 30센티급 벵에돔을 연신 뽑아 올리는 걸 보며 명당은 따로 있었다는 걸 실감했다. 그들은 자리를 놓칠 세라 동네 사람들끼리 자리를 인수인계하며 외지인이 그들의 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걸 철저히 방어하고 있었다.



이미 마음을 접어서 그랬을까? 멋진 일몰을 감상할 수 있다는 데 만족하며 그래도 한 마리 잡아보겠다고 계속 낚시를 던지다 해가 거의 사라져 갈 무렵 낚시를 접기 시작했다. 밑밥은 너무 많이 사 와서 쓴 것보다 버린 게 두 배는 많았다. 그거 모아서 양식장 차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말이다. 아무튼 3일 동안 벵에돔을 구경도 못했다.


8시가 넘은 시간. 식당에 가서 소주 한잔 하려 해도 시간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오늘도 회를 사서 먹기로 했지만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집에 가서 먹긴 그렇고 해서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캔맥주를 사다 먹기로 했다. 회는 하도리의 로컬 횟집인 일미도에서 도다리회를 사 가지고 가기로 했다. 실수했던 게 도다리세꼬시를 사 갔어야 했는데... 아무튼 도다리회도 맛있는 건 사실이니.



문 닫을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손님은 없었고 포장 손님만 줄을 지었다. 마침 난 운이 좋아 가자 마자 도다리회를 포장해 나올 수 있었고 약속 장소인 성산 오조리로 향했다.



편의점 앞에서 일행을 다시 만나보니 편의점 앞에서 한잔 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란 걸 알게 됐고 난 차에 실어둔 캠핑장비를 다시 활용하기로 했다. 마침 나만의 비밀 장소가 머리를 스쳤고 내가 먼저 가서 자리를 펴고 준비를 마쳤다.

완벽한 우리만의 정원이다. 가로등 불빛이 밝아 다른 조명을 준비할 필요도 없었다.



얼마나 운이 좋은지 서울은 37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열대야로 죽겠다던데, 우리는 태풍 영향권의 제주에서 시원하다 못해 춥기까지 한 밤바람을 맞을 수 있었다. 포장해온 도다리회가 기름지고 찰지다. 이번에 내가 현지인에게 선물한 14K금잔에 소주를 따라 드렸다. 고급지게 마시는 거다.

분위기가 좋으니 안주도 모자라고 소주도 모자랐다. 하지만 과음은 금물, 성산항 로터리에 있는 교촌치킨에 전화를 걸어 치킨을 주문해서 모자란 안주를 충당했다. 밤이 깊었지만 밤이 긴 줄 몰랐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제주도 여름휴가의 마지막 밤을 아스라이 즐겁게 보내고 있었다.



멀리 성산이 보이는 포인트. 그 정원 같은 조용한 곳에서 우리의 추억은 깊어만 갔다. 다시 생각해도 멋진 밤이었다. 제주에선 이렇게 캠핑장비를 싣고 다니면 어디서든 이렇게 지낼 수 있다. 안 해 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제주에서의 제주스러운 정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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