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도시남, 회사에서 농사를 짓다

by 루파고

코로나 때문에 사무실에서 점심을 해서 먹기 시작한 후로 제주도에서 당근, 감자, 양파, 마늘, 비트, 고구마, 파, 고추, 청양고추, 부추, 깻잎, 양배추, 상추, 더덕, 고서리, 곰취, 두릅, 방풍, 달래 등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다양한 농산물과 산에서 뜯은 것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뿐인가? 톳, 미역, 보말, 소라젓, 벵에돔, 옥돔, 갈치 등 해산물은 기본이고 흑돼지는 부위별로 해서 족발, 껍데기까지 가지가지 올라오고 귤, 한라봉, 레드향, 골드향 등 귤은 종류대로 올라온다. 여기서 끝나면 좋은데 전국 각지에서 철마다 제때 올라오는 것들은 말할 것도 없다. 생대구, 굴, 미더덕, 갓김치, 생홍어, 새조개, 모시조개 등등등등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올라와서 제때 먹어치우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여기서 그치면 다행인데 지방 출장 때마다 사 오는 특산물도 그렇고 타 지역의 거래처와 지인들이 보내주는 특산물에다 거래처에서 보내주는 것들까지 합치면 종류나 양은 그야말로 뜨헉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업무적으로 하는 관계사 월요일 점심식사도 우리 사무실에서 하게 됐고, 거래처 분들도 근처를 지날 때면 점심식사를 하러 오겠다며 전화를 하고 들이닥친다. 심지어는 저녁 술자리까지 사무실에서 뚝딱 해결해버리는 지경이 되고 말았으니 요즘엔 어쩌다 확장된 주방과 홀이 구내식당처럼 되고 말았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했다. 제주에서 공수된 청양고추가 얼마나 맵고 맛있는지 그 맵다는 초록마을 청양고추조차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는 터라 난감한 상황이 된 것이다. 어찌나 매운맛에 적응이 된 것인지 이제는 제주고추가 아니면 맛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청양고추를 화단에 심기로 했다. 그런데 농사를 시작하게 된 건 그전에 파를 사다 뭍은 게 도화선이 됐다. 양재동 청계산 가는 길에 쭉 눌어선 화원에 가서 청양고추를 사 올 요량으로 방문했다가 너무 일러 얼어 죽는다는 말에 5월 10일까지 기다려 다시 방문했고 청양고추에 만족하지 못하고 상추, 적겨자, 가지를 심고 그것도 모자라 다시 찾아가 토마토와 상추를 추가로 심고 말았다.

사진에 보이는 감자는 썩어가던 제주감자를 던져놓은 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판이다.

식구들이 이렇게 늘어났다. 이젠 더 심을 공간도 없다. 이 녀석들이 자라면 이 텃밭이 빽빽해질 거란 상상을 하지만 아마 풀떼기는 자라기가 바쁘게 뜯어먹을 게 분명하다. 비록 이렇게 농사는 시작했지만 역시 공수되는 건 여전하리라.

아무튼 바로 뜯어서 바로 먹는 즐거움은 있을 것 같다.


녀석들을 심은 후, 난 이틀에 한 번 물을 주고 매일 아침마다 얼마나 자랐는지 체크하시 시작했다. 사진엔 없지만 방울토마토에는 벌써 꽃이 6개나 폈다. 아직 이른 거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감자는 미쳤는지 벌써 무성하게 자라 꽃도 피고 있었다. 어젠 너무 무성해 가지를 솎아내주었는데 미안하긴 했지만 우리 목적은 감자가 아니라 상추여서 과감히 자르고 말았다.


웃기는 건 드립 커피 내리고 남은 커피 찌꺼기와 ABC주스를 만들고 남은 당근, 사과 찌꺼기를 비료로 묻어 두었던 것이 영양분이 넘쳐 나는지 파에는 벌써 꽃이 만개했다. 게다가 30 뿌리 정도 심어 두었던 녀석들은 이제 파숲을 이루고 있다. 이젠 가지 쳐서 먹어야 할 판이다. 냉동실에 있는 파부터 끝장내고 볼 일이다.





여태껏 엄마가 농사를 지어 보내준 건 먹어봤지만 내가 직접 이렇게 농사를 지어 볼 줄은 몰랐다.

아주 작지만 묘한 뿌듯함이 있고, 왠지 모를 기대감이 있다. 농부의 마음이 나와 다르겠지만 농사를 두고 자식 키우는 마음에 비유했던 걸 아주 모르지는 않을 것 같다. 첫 가지, 첫 고추, 첫 방울토마토가 열리면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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