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춘자의 취미생활

by 루파고

"오늘도 즐거운 시간이 되셨는지 모르겠네요. 사차원 춘자였습니다."

ENG 카메라 속 앵글에 늘씬하고 앳된 여자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초승달 눈매로 방긋 웃는 표정이 춘자라는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방송이 끝나는가 싶더니 춘자가 고개를 살짝 비틀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깜빡할 뻔했네요. 글쎄, 어제는 어떤 시청자께서 제 개인 메일로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어떻게 알게 되셨는지 모르겠는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아무튼 그건 제 개인사니까 그렇다 치고요, 오늘 이야기 중에 빼먹은 게 있어요. 방금 메종님께서 올려주신 내용을 보니까 지금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던 것 같더라고요. 덕분에 문제가 잘 풀릴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다음 주에 만나요."

'ON AIR' 램프가 꺼지자 환하게 웃던 여자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어두운 그늘이 서렸다. 춘자는 스테이지에서 내려와 ENG 카메라 뒤에 선 PD에게 다가오며 큰 소리로 외쳤다.

"돈 뿌린 그 인간 좀 사이코 아냐? 이왕 돈을 뿌릴 거면 한국에서나 할 일이지, 왜 하필 외국까지 나가서 뿌리고 그러는 거냐고요."

춘자의 입술은 반쯤 튀어나왔지만 예쁜고 앳된 얼굴은 발랄하게 보이게 했다. 아무나 소화해 내기 힘든 핫핑크 립스틱을 바른 모습이 춘자라는 이름마저 예쁜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듯했다.

"춘자야, 제발 성격 좀 죽이면 좋겠어. 세상에 이런 놈도 있어야 우리도 방송해서 먹고살고 그러지 않겠어? 말이야 바른말이지 아까 그 사람 댓글처럼 범죄수익금이라면 그걸 줍는다 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할 텐데 뭘 그래. 어쩌면 차라리 못 본 게 속 편한 일인지도 몰라."

하얀 얼굴에 키가 185cm는 되어 보이는 PD가 말했다. 춘자가 PD 앞에 놓인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손가락으로 화면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방송 끝나면 제발 춘자라고 부르지 말아 주시죠. 다들 멀쩡한 내 이름 놔두고 왜 자꾸 춘자라고 부르는 건지 모르겠어요. PD님, 이 사람 저번에 그 사람이죠?"

춘자의 질문에 PD가 노트북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사람은 프로페셔널하게 일할 필요가 있지. 춘자가 뭐 어때서 그래? 이 방송 끝날 때까지는 그냥 춘자로 살아봐. 말이야 바른말이지, 춘자 아니었으면 이렇게 인기몰이를 하기나 했겠어?"

PD의 말에 춘자를 아랫입술을 콱 깨물었다. PD의 말에 틀린 부분이 없다는 것을 본인도 잘 알고 있었지만 하필 프로그램 이름을 춘자로 짓는 바람에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버린 셈이었다.

"원래부터 제 방송이었거든요! PD님이 해주신 거 하나도 없으니까 그런 말씀은 삼가해 주세요. 그보다 질문에 답이나 하시죠."

춘자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묻어 있었는데 PD는 그걸 즐기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하겠는데 춘자 씨는 그런 게 다 기억나나 봐?"

PD는 '춘자'라는 이름에 '씨'라는 호칭을 달며 강한 톤을 주었다.

"으이그~ 됐어요. 그냥 춘자로 살래요. 아무튼 간에, 이상하게 아이디가 익어서 그런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요?"

"그 사람이 뭐라고 했길래?"

"아뇨. 별 이상한 건 없었는데 느낌이 그래요. 하긴 뭐 비슷한 아이디가 한두 개도 아니고."

춘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굽혔던 허리를 폈다.

"우리 일도 끝났으니 밥이나 먹으러 가죠."

춘자는 촬영 장비를 정리하고 그들 옆으로 다가온 카메라 감독의 소매를 붙들었다. 시선은 PD를 향하고 있었는데 표정은 묘한 감정을 품은 듯 보였다. 카메라 감독은 왠지 살려달라는 느낌의 불쌍한 표정이 간절했다.

"저... 저기~ 저는 오늘 집에 일찍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덩치가 곰만 한 카메라 감독이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 양반이, 오늘도 도망칠 궁리만 하네요. 집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거 뻔히 다 아는데 어딜 도망가려고 그래요? PD님이나 감독님이나 방송국 아니면 놀아줄 사람도 없잖아요. 저나 되니까 저녁 시간에 놀아주는 건데. 싫어요? 오늘 예쁜 동생들 좀 나오라고 했는데 오지 말라고 전화해야겠네요."

춘자의 유혹은 PD와 촬영감독에게 적중했는지 그들의 표정은 밝은 빛을 발산했다. 각자 환상의 나래를 펼치는 듯했다.

"하여튼 노총각들이란. 어째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그리들 좋아하시는지. 뻥이거든요."

"그럼 그렇지. 웬걸 했네. 우리 걱정이랑 말고 댁 걱정이나 하슈~ 나이 서른에 남자 친구도 하나 없으면서 잘난 척은."

PD의 보복성 느낌이 가득한 말은 끝부분에 들어가면서 점점 기어 들어갔다. 춘자의 심기를 잘못 건드리면 오늘 술자리가 편치 않을 것이라는 걸 그간의 경험으로 충분히 습득한 터였다. 이상하게도 춘자는 술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휘어잡는 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춘자가 주량이 세거나 한 것도 아니다. 리더십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했는데 항상 엉뚱한 의견 때문에 사람들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말도 안 되는 듯한 의견이 분명한데 잘 듣고 보면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PD는 마치 언어의 마술사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오죽하면 방송 작가들도 혀를 내두르는 재치에 감복하곤 했으니까.

언제나처럼 술자리 종목은 촬영감독이 정했다. 초반에는 춘자가 원하는 곳으로 갔었지만 나름 식도락 기질이 있던 촬영감독이 메뉴를 선정하는 역할을 맡았다. 공식 행사도 아닌데 '춘자의 취미생활' 촬영이 있는 날은 꼭 술자리로 마무리됐다. 촬영 스태프들 중 PD와 촬영감독을 제외하면 누구든 자유롭게 집에 돌아갈 수 있었지만 누구도 자리에서 이탈하는 법은 없었다. 춘자와의 술자리는 언제나 왁자지껄하고 즐겁기 때문에 한 주의 스트레스가 모두 풀려나가게끔 했다. 그들은 웬만한 약속이 아닌 이상 자리에 함께 했다.

'춘자의 취미생활'이 정규 방송을 타게 된 건 불과 육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원래는 춘자가 유튜브에서 취미 삼아 했던 방송인데 워낙 인기가 많고 정규방송으로도 적합한 내용이라 방송국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물론 유튜브에서도 방송은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방송은 언제나처럼 실시간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때문에 인기는 날로 높아졌다. 내용 특성상 녹화방송이 적절한데 춘자는 생방송을 고집했다. 이유는 의외로 단순했다. 전에 해왔던 대로 시청자들과 실시간으로 의견을 나누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

술자리는 기껏 한 시간 남짓 지났을 뿐인데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어 요란벅쩍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스탭 몇 명은 벌써 얼굴이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PD, 촬영감독, 춘자는 술을 한 잔도 안 마신 듯한 모습이었다.

"비트코인으로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 해도 이건 좀 이해가 안 돼요. 한두 푼도 아니고 말이에요. 목격자 표현으로는 한 곳에서 하루에 뿌린 돈이 적어도 1억 원은 됐을 거라고 했어요. 마카오에서 며칠 동안 그러고 다녔다고 소문이 파다했다는데 못해도 십억 원은 뿌렸을 거 아녜요. 십억이 누구 집 개 이름이냐고요. 그리고 그 사람이 거기서만 그러고 돌아다녔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고요. 자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비트코인 신흥 부자라고 치자고요."

춘자는 흥분을 참지 못하고 식식거리더니 이내 생각에 잠겼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춘자의 입술이 움직이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아. 정말 술 마셔서 그런지 계산이 안되네. 대체 돈의 가치가 어떻게 된 거냐고요? 우리는 먹고살려고 별 짓 다 하면서 사는데 말이에요."

"춘자 씨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죠. 우리보다 훨씬 많이 벌잖아요."

춘자의 하소연에 스탭 중 한 사람이 혀 꼬인 소리로 말했다. 춘자가 눈을 가늘게 뜨며 스탭을 향해 쏘아보자 그는 얼어붙은 듯한 모습이 되어 바로 사과했다.

"그런 의미는 아닌 거 알죠? 농담이에요."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소주잔을 들이켰다.

"제가 그렇게 무서워요? 대체 왜 그러시죠? 저도 농담하신 거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뭐 제가 조금 더 버는 건 저도 알고 있고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항상 술을 사잖아요. 돈 많이 버시는 PD님도 안 사는 술을요."

춘자가 PD의 어깨를 슬쩍 밀자 PD는 움찔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그렇고 말고. 아무튼 오늘은 술이나 마시고 주말에 쉬면서 아이디어 팍팍 짜서 공유해요. 우리는 한 팀이니까 우리 프로그램 시청률 높일 수 있게 함께 고민하자고요."

"주말에 쉬란 이야깁니까? 일을 하란 이야깁니까?"

***

술자리를 파하고 각자 집으로 흩어진 후 춘자와 PD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인도 위 보도블록을 툭툭 찼다.

춘자는 카카오 택시 앱을 켜 둔 스마트폰과 거리를 번갈아 봤다.

눈이 내리려는지 싸늘하고 습한 공기가 세상을 장악하고 있었다.

"왜 술자리 있는 날마다 매니저를 일찍 보내는 거죠?"

PD가 물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춘자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제가 워낙 기다리는 걸 싫어해서 그래요. 내가 싫은 걸 남한테 주문하는 건 좀 그렇잖아요? 그것도 오빠한테까지 그러는 건 더욱 싫고요."

춘자는 입술에 힘을 주며 말했다.

"혹시 나랑 같이 있고 싶거나 그런 건 아닐 거라는 건 알 것 같기도 하면서 그래요."

PD는 머뭇머뭇 말을 하면서도 춘자의 얼굴을 바로 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이건 무슨 소린가요? 지금 추파 던지는 건가요? 아니면 찔러나 보는 건가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택시 다 왔네요. 역시 블랙이 좋아요. 그렇죠?"

춘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모범택시 한 대가 춘자 앞에 섰다. PD는 뭔가 말할 것이 더 남아있었던지 찜찜한 표정을 하며 택시에 올라타는 춘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다음 주에 봐요."

춘자를 태운 택시가 떠나자 PD는 긴 한숨을 몰아 쉬었다.

긴 수증기가 습한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너풀거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진짜 겨울이 오려나보구나."

PD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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