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에게서 도망치듯 택시를 탄 춘자는 택시 기사에게 짧게 인사말만 던지고 스마트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열한 시를 넘긴 지 한참이었다. 입맛을 쩍 다신 춘자는 핸드백에서 스마트폰을 하나 꺼내 들었다. 다른 전화였다. 화면을 켜자 텔레그램에 새로운 글을 알리는 풍선에 알람이 붙어 있었다. 텔레그램을 열자 대화창 하나에 새로운 글이 천 개가 넘었다. '휴~' 춘자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 많은 글을 언제 다 읽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오늘 저녁에도 벽 타기부터 시작이네요. 늦게 출근해서 미안합니다.>
춘자의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스마트폰 화면 위를 날아다니며 타이핑했다. 그리고는 첫 번째 메시지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도 새로운 메시지는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육십 가까이 되어 보이는 택시 기사가 수시로 힐끗거렸지만 춘자는 메시지를 확인하느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춘자의 표정은 화면을 내리면서 묘하게 변해가더니 혼잣소리를 했다.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재밌어지겠는 걸."
"무슨 좋은 일 있으신가 봅니다? 춘자 씨 맞으시죠?"
택시 기사의 목소리에 반가운 느낌이 가득 담겨 있었다. 드디어 춘자가 고개를 들자 룸밀러에 비친 택시기사의 표정에 미소가 급히 번졌다.
"네. 맞아요. 어떻게 저를 다 알아봐 주시네요. 고맙습니다."
춘자는 택시 기사가 자기를 모를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답했다.
"어떻게 저희가 춘자 씨를 모르겠어요. 언젠가는 춘자 씨를 모실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며 운행하는걸요. 저희가 춘자 씨 광팬이라는 거 잘 아시잖아요."
택시 기사는 자랑스러운 듯 소리를 내며 짧게 웃었다.
"그나저나 한잔 하셨나 봐요?"
"어떻게 아셨대요? 제가 술 마셔도 티가 잘 안 나는데요."
춘자는 짧게 미소 지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춘자가 유튜브에서 생방송 프로그램으로 <춘자의 취미생활>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역시 초반이라 시청자도 많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는지 춘자가 선정했던 이슈가 방송을 타게 됐다. 마침 자취 여대생 가택침입 사건을 두고 대처방법이나 경험담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춘자 역시 학창 시절 잠시 자취를 하다 비슷한 경험을 했던 터라 무게감 있게 다루고 있었는데 주거침입 강도강간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CCTV에도 잡히지 않아 경찰이 용의자의 몽타주를 공개했지만 검거되지 않았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만 흘러가던 중 원룸주택이 밀집한 지역에서 맨발로 택시를 잡아 탄 여대생이 있었다. 새벽 한 시가 다 된 시간이고 거리에는 사람도 별로 없었다. 빨리 경찰로 가자는 다급한 목소리에 부리나케 가까운 지구대로 향했다. 걱정이 된 택시 기사는 차에 두었던 자신의 슬리퍼를 꺼내 맨발인 여대생에게 주고 지구대 안까지 동행했다. 뒤따라 온 차는 없었지만 딸 같은 여대생이 걱정되어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은 아직 흥분상태이던 여대생을 다독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간절해 보였다. 마침 여경이 있어 다행이었는지 금세 진정할 수 있었고 상황을 진술하기 시작했다. 그냥 갈 수 없어 여대생의 설명을 귓동냥하던 택시 기사는 지구대 밖으로 나가더니 택시 안에서 스마트폰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경찰과 여대생의 대화에 끼어들며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그가 보인 사진은 지난번 사건의 용의자 몽타주였다. 여대생의 얼굴에는 두려움, 안도감 등 다양한 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여대생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지구대는 갑자기 분주해졌고 경찰 두 명이 순찰차에 올라타고 급히 지구대를 빠져나갔다. 현장 근처로 근처 지구대는 물론 본청 수사관까지 출동했지만 용의자의 모습은 발견하지 못했다. 다음날까지 이어진 CCTV 수색에도 불구하고 용의자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귀신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택시 기사의 활약이 있었다. 그날 저녁 <춘자의 취미생활>에 이 사건의 전말을 공유했고 춘자는 택시기사가 알려준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건 전까지만 해도 영상 편집 후 업로드하던 방송은 생방송으로 변신했다. 사건 지역 인근의 택시 기사들은 SNS를 통해 춘자의 방송에 접속했고 그들의 정보는 거미줄처럼 네트워크를 이루기 시작했으며 용의자의 몽타주와 비슷한 사람이 검거되기까지는 불과 하루가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춘자의 취미생활>은 택시 기사들의 정보로 사건을 해결했다는 자부심으로 인기몰이를 했고 정규 방송에서 사연이 알려지면서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민경은 잊혔고 어쩔 수 없이 춘자라는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 사건을 해결한 후에도 택시 기사들의 활약은 줄기차게 이어졌다.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지만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준 적도 있고 심지어는 길을 잃은 강아지의 주인을 찾아주기도 했다. 춘자의 방송은 일반인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친숙한 방송이 된 것이다. 마치 생활의 해결사 마냥 춘자의 취미생활은 쭉 이어졌다.
"그렇긴 해요. 아저씨들 덕분에 제가 사는 거죠."
춘자는 미소를 지었다. 전혀 가식적이거나 하지 않았다.
"요즘에는 뭐 재미있는 사건 없나요? 저희는 언제라도 춘자 씨와 한 편이니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언제라도 충성하겠습니다."
"어유~ 아저씨! 무슨 충성 까지나요. 이미 저희 가족이나 마찬가지이신데요. 그나저나 정규방송으로 간 후로는 방송국 통제를 받아야 해서 예전처럼 민감한 주제를 제 멋대로 다루는 게 어려워지긴 했어요. 가끔 화도 나요."
"저희도 알고 있어요. 보는 우리도 스트레스인데."
택시 기사의 말에 춘자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아세요?"
"우리가 뭐 춘자 씨 얼굴을 하루 이틀 보고 산 것도 아닌데, 우리 딸 같아져서 이제는 표정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니까."
택시 기사는 춘자와의 친숙함을 드러내기 위해 과장하여 표현했지만 춘자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대화창의 글을 계속 쌓여갔다. 춘자는 집에 가서 편히 읽기로 하고 택시 기사와 대화를 이어갔다. 어차피 잠시 후면 집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는 택시 기사의 제안을 만류하고 오히려 감사하다는 표현으로 핸드백 안에 들었던 영양제 한 줄을 쥐어 드리고 아파트로 들어섰다. 방문객을 철저히 관리하는 강남 한복판의 고급 주상복합 건물 입구에는 제복 차림의 경비원이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손인사를 하는 춘자와 얼굴을 마주친 젊은 경비원의 얼굴에 붉게 변했다. 춘자가 들어오는 것을 본 경비원은 미리 엘리베이터 호출 버튼을 눌러 둔 상태였다. 다른 입주민들에게도 그렇게 서비스하는지 궁금했지만 딱히 물어보지는 않았다. 빠른 속도로 올라가던 엘리베이터는 30층이 넘어서야 속도를 줄이더니 37층에 가서야 멈춰 섰다. 춘자는 미끄러지듯이 현관문 앞에 서서 지문 인식과 비밀번호를 눌렀다. 이중 보안 장치지만 춘자는 이런 것도 신뢰하지 않았다. 모를 땐 괜찮았지만 방송을 시작하면서 몰라도 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알아버린 게 문제였다.
손을 더듬어 조명을 켜자 대낮처럼 밝은 거실이 환하게 춘자를 맞이했다. 거실에 가구라고는 100인치는 되어 보이는 대형 TV와 소파밖에 없고 벽에는 TV만큼이나 커다란 그림 한 장이 전부였다. 바닥은 하얀색 대리석이 천장의 조명을 은은하게 반사했다. 춘자는 손을 대지도 않고 차 버리듯 단화를 벗고는 곧장 거실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 체력이 좋은 편이지만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금세 몸이 풀어져버리는 듯했다. 춘자는 쿠션을 가슴께까지 당겨 상체를 세운 뒤 스마트폰 화면을 켰다. 대화창에는 벌써 두 배가 넘은 글이 달려 있었다. 춘자의 입에서는 절로 아이고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시간 가까이 글을 읽은 춘자는 스마트폰 자판을 두드렸다.
<이제 다 읽었네요. 잠시만요.>
메시지를 전송한 춘자는 평소에 쓰던 스마트폰을 켜고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간 지 몇 초 되지도 않아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어쩐 일이시래요. 이런 시간에 저한테 전화를 다 주시고."
상대의 목소리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PD님 보고 싶어서 그러죠."
춘자는 목소리에 애교를 섞여 말했다.
"이거 정말 모르는 사람이라면 녹아나겠네요. 부탁할 게 뭐가 있길래 이러시는지 걱정스럽습니다."
"설마요. 그게 아니고 아까 저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아서 전화했는데, 그냥 끊을까 봐요?"
춘자는 대화 끝에 일부러 코웃음을 소리 나게 흘려보냈다.
"할 이야기야 많지요. 그런데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네요. 그보다 정말 할 말 있어서 전화한 거 아닌가요? 할 말 없으면 끊어요. 아까 억지로 술 먹여서 힘들어 죽겠어요."
PD는 애써 센 척하는 거라는 걸 춘자는 잘 알고 있었다. PD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동물적인 감각으로 알고 있었고 자신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스스로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에게서 매력을 느끼는 건 사실이었다.
"상당히 업무적인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착각은 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환영입니다. 우리 일이 밤낮 가리는 일도 아니고."
PD는 춘자와의 대화가 이어지는 게 내심 맘에 들었는지 호흡부터 긴장되어 있음이 전해져 왔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제 정보원에 의하면요. 우리......"
"잠깐만요. 오늘 말 나온 김에 호기심은 풀고 갑시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 했는데 그 정보원이라는 게 대체 뭡니까? 우리가 모르는 뭔가 있는 건가요? SNS 창도 공유한 상태잖아요. 대체 뭐가 더 있는 거죠?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 그런 정도는 공유해도 되는 거 아녜요?"
"어허~ 이거 왜 이러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 밥줄인데 몽땅 오픈할 수는 없죠. 저도 먹고는 살아야죠. PD님이야 아주 조금 믿어볼 수는 있겠지만 방송국을 어떻게 믿어요? 이 방송도 원래 제 것인데 나중에 이름 바꾸고 진행자 바꿔서 새로 만들면 저는 뭐 먹고살라고요!"
춘자의 말에 PD는 잠시 고민하는 듯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더니 짧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긴 해요. 춘자 씨가 방송에 혁신을 가한 건 사실이죠. 덕분에 다른 방송국에서도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으니 말입니다. 감히 누가 이런 걸 생방송으로 진행할 생각을 했겠어요. 그것도 SNS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까지 말이죠. 그 많은 불특정 다수의 메시지를 방송에서 공유한다는 건 엄청난 모험이라고요."
<춘자의 취미생활>이 인기를 끌자 정규방송은 물론 대부분의 방송사들이 비슷한 형식의 프로그램을 론칭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들 아니었으면 춘자의 모험 역시 무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필터링 시스템 등을 잘 활용해 방송이 불가한 단어 등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기도 했지만 예상외로 참여자들 스스로 자정작용을 하여 무난한 진행이 가능했다. 실시간 SNS는 각종 연예, 오락 프로그램에서 대거 활용했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춘자의 네트워크와 그동안 만들어진 그녀만의 이미지는 쉽게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방송사들은 그들의 자금력이면 쉽게 추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택시 기사는 물론 많은 단체들의 정신적 후원은 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춘자의 방송은 생방송으로 돌린 후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다. 춘자의 원래 주인공인 민경의 진짜 취미생활은 추리였다. 처음에는 사건 하나를 선정해 시청자와 함께 사건을 추리하는 것이 방송의 요지였다. 취미 생활로만 보기에는 상당한 추리력을 인정받아 몇몇 프로파일러들에게마저 극찬을 받기도 했던 지라 <춘자의 취미생활>이 다루는 사건은 점점 농도가 짙어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방송에서는 잘 다루지 못하는 주제도 춘자는 방송에 띄우고 말았다. 시청자들은 잘 모르는 내용이지만 춘자와 PD가 투쟁으로 일궈낸 일이다. PD는 춘자 덕에 밥줄을 내려놔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까지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만약 그들이 풀어낸 사건이 없었다면 그랬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기껏 일 년 정도밖에 안 된 그들이지만 고락을 함께 해 온 덕에 끈끈함이 있었다. PD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밀을 유지하는 춘자의 이중 정보원 구조를 공유하지 않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오늘 들어온 정보에 의하면요, 돈을 뿌린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해요. 그것도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규모의 액수를 말이죠."
"그걸 어떻게 알죠?"
"누가 봤대요."
"다른 장소라면 한 명이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 두 사람 이상이었을 사람들이 모두 춘자 씨 정보원이라는 거네요. 그렇죠?"
"PD님, 제발 부탁이 있는데요. 우리끼리 개인적으로 대화할 땐 그냥 실명 좀 불러주면 안 될까요? 이러다 정말 춘자 되겠어요. 이제는 이름도 까먹을 것 같단 말이에요."
"그렇다면 민경 씨도 PD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제 이름을 불러주시면 좋겠네요. 저도 제 이름이 PD 같거든요.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우리 엄마도 PD라고 불렀던 것 같지는 않은데... 이름이 뭐였더라."
PD의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알았어요. 호현님."
민경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됐네요. 그냥 살던 대로 살죠. 아무튼 정보원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수 없다는 거네요. 춘자 씨. 아니, 민경 씨가 굳이 공유할 생각이 없는 걸 억지 부릴 생각은 없어요. 아무튼 그런데 사실 그들이 돈을 뿌리던 불에 태우든 무슨 상관인가 싶긴 해요. 자기가 번 돈으로 자기가 제 멋대로 하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냐고요."
"만약 그게 범죄수익금이라면요?"
민경의 스마트폰에서는 호현의 고른 숨소리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