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종료를 알리는 촬영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시준의 표정이 붉게 변했다.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어깨에도 힘이 빠진 것처럼 보였다. 스튜디오를 정리하는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춘자는 다시 민경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준과 민경은 아무런 대화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마침 그런 모습을 호현이 지켜보던 중이었다. 시준은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민경아. 아닌가? 이제는 춘자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할까? 대체 나를 초대한 이유가 뭐니?"
호현은 그들 사이에 일이 터질 것을 방송 도중 예감하고 있었다. 시준의 표정으로 보아 민경에게 욕이라도 쏟아부을 기세였다. 호현은 그들 사이에 중재를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민경은 차라리 춘자였을 때가 대하기 쉬운 여자였다. 이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로 변한 상황이다. 어쩌면 스튜디오 안에 있을 때까지는 춘자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춘자는 카메라 화면에는 잡히지 않는 테이블 뒤에서 연두색 가죽 파우치를 꺼내 테이블 위에 거치해 두었던 태블릿을 접어 넣었다.
"내가 거짓말 한 건 없잖아? 그냥 그동안 미안했던 거, 이제야 갚았다고 생각해. 내 덕분에 유명 방송도 탔으니 이만하면 오히려 내가 받을 게 더 많아진 것 같은데."
민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시준이 소파에서 일어나자 민경은 데스크를 빠져나가려 했다.
"야! 내가 아직까지 니 꼬봉인 줄 알아?"
시준의 얼굴을 아까보다 더 빨갛게 변해 있었다. 거친 숨을 식식거리는 게 누가 봐도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민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른손을 들어 흔들었다. 호현은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자리를 만들기 전부터 위태위태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결과적으로는 시준이 춘자의 제안을 곱게 따른 것이다. 민경은 세간에 블록체인 전문가로 알려진 시준이 사실은 비트코인으로 엄청난 부를 챙긴 것으로 알고 있었다. 모두들 떠도는 소문이라 시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적어도 민경만이 아는 진실이 있었다.
시준은 민경을 따라나서다 말고 식식거리며 출구 쪽으로 향했다. 시준은 몇 가닥 되지도 않는 케이블에 발이 걸려 몇 걸음을 휘청거리다 바닥에 무릎을 때리고 욕설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앞도 보지 않고 출입구를 향했다. 문 앞에 선 시준은 민경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소리쳤다.
"너, 이거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쓸데없는 소리 했다가는 내가 어떻게 할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알아서 해!"
시준은 문을 열고 뛰쳐나가며 거세게 문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자동문의 유압장치 때문에 그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시준은 알아들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으며 문을 걷어 차고 스튜디오를 떠났다.
호현 옆에 선 민경은 팔짱을 끼고 피식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까도 되는 건가요? 그래도 친구라면서요."
호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친구요? 친구였죠. 예전에. 그리고 저 새끼는 당해도 싸요. 아니죠! 더 세게 때려야 아픈 걸 알 테죠. 이제 시작이라는 걸 저놈이 알까 모르겠네요."
"대체 어떻게 하려고요? 또 인터넷에서 뭔 사고를 치려는 건 아니죠?"
호현은 지난 주제를 다루며 일명 정보원 격 되는 사람들을 풀어버리는 바람에 거센 항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덕에 일이 더 잘 풀리기는 했지만 여차하면 후폭풍에 시달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 이유가 있어요."
민경은 호현의 팔을 잡아끌었다. 호현이 당황한 표정을 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벌써요? 정리는 하고 가야죠."
"이런 식으로 나오면 비밀 이야기는 없는 겁니다."
춘자는 호현의 소매를 잡았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호현은 입에서 쩝 소리를 내더니 촬영감독을 불렀다. 마침 촬영감독이 근처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그는 호현의 손짓을 보았으면서도 딴청을 부렸다.
"봤죠? 쟤도 이젠 나를 모른 척한다니까요. 어쩜 촬영 때마다 이렇게 사람들을 못살게 굴어요."
"우리는 한 팀이잖아요. 저는 딱 오늘 하루만 보면서 사는데 이날 하루만 저한테 할애하는 게 그렇게 아까워요? 그리고 PD님은 촬영 끝나면 딱히 바쁜 것도 없잖아요. 그보다 오늘은 정말 비밀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오죽하면 PD님만 가자고 하겠어요. 비밀 아니었으면 촬영감독님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어요."
춘자는 맘대로 하라는 듯, 두 선을 허리 뒤에 설친 채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한 손에는 태블릿 파우치가 들려 있고 한 손은 파우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호현은 태블릿 안에 정말 대단한 비밀이 있다고 알아 들었다.
*
호현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노트북 위에 던져두고 민경 뒤를 따라갔다. 민경은 벌써 십 미터 이상 앞서 가고 있었다. 같이 가자고 소리쳐 불렀지만 민경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호현은 이번만큼은 민경에게 말리지 않겠노라 다짐에 다짐을 반복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민경은 방송국 밖으로 나가지 않고 로비에 마련된 업무용 의자에 앉았다. 호현이 맞은편 의자에 앉으려 하자 민경은 옆 자리에 앉으라며 잡아끌었다. 호현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몇 뼘 정도의 간격을 두고 앉았다. 호현은 민경에게서 민트향과 애플향이 섞인 프레시함을 공유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가깝게 붙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호현의 심장이 요동쳤다. 호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민경은 파우치에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켰다. 암호화된 패턴을 그리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낀 얇은 금반지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귀금속보다 앙증맞아 보였다. 민경의 패턴은 너무 쉬웠다. 물음표 모양이었다.
"패턴을 이렇게 보여주고 그래도 돼요?"
호현이 물었다.
"뭐 어때요? PD님에게 비밀이 어딨다고."
"세상에, 그걸 말이라고 해요? 비밀이 아닌 건 뭐가 있던가요? 죄다 혼자 일을 저질러 놓고 나에겐 수습만 맡기고선. 저 아니면 민경 씨 방송 맡아줄 사람 하나도 없어요."
호현의 말이 전혀 과장되지 않았다는 건 민경 역시 알고 있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양 민경은 아무런 답변 없이 태블릿의 이미지 갤러리를 열었다. 민경의 손가락은 빠르게 수십 장의 사진을 넘기더니 갑자기 멈추어 섰다.
"바로 이 사진이거든요."
달러를 공중으로 뿌리는 남자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하늘에 날린 돈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조명이 어두운 실내에서 급히 촬영된 사진이라 포커스도 날아가 있었다. 아는 사람의 사진이라 할지라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게 왜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진인데요."
"그럼 이 사진은요?"
호현은 다음 사진에 집중했다. 역시 지폐를 뿌리는 사진인데 얼굴이 선명하게 잡혔다. 한국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제 글로벌 뉴스에 올라온 동영상에 나온 그 사람 같아요. 아까 그 사람하고 같은 사람 맞죠?"
민경의 질문에 호현은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일도 없네요. 이게 지난번에 말했던 그 자료군요."
호현의 대답에 민경이 가늘게 웃었다.
"돈을 뿌리는 사람은 두 명이었어요. 그리고 방송에 나온 동영상의 한 사람이 그중 한 사람이었고요. 게다가 제가 받은 사진은 방송을 타기 이틀 전에 받은 사진이고요."
"그래서요. 그게 뭐 대단한 일이 되나요? 우리 이번 주제는 너무 진부해서 대충 접고 다른 걸로 옮겨 타야 할 것 같아요. 좀 놀라운 사건이기는 하지만 시청자들 공감도가 많이 떨어져서 시청률도 떨어졌단 말입니다. 다음 주 방송은 다른 걸로 바꾸고 초반에 살짝 정리 코멘트만 날리고 말자고요. 미스터리 정도로 끝내는 게 어떨까 하는 게 제 생각이에요."
"제 생각에는 아직 멀었는데요. 오늘 느낀 거 없어요?"
민경의 질문에 호현은 별 떠오르는 것도 없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글쎄요. 그다지."
"시준이 그 새끼가 왜 저렇게 날뛰는지 아세요?"
"음, 저야 잘 알 수 없지만. 민경 씨가 그렇게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을 보면 첫사랑 정도 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은 해 봤네요."
민경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하여튼 생각하고는, 그래 가지고 어디 우리 방송 가지고 먹고살겠어요? 제발 추리 좀 하세요."
"그게 아니면 됐죠. 대체 뭔데 그래요? 아, 맞다! 비밀 이야기, 그 비밀 좀 들어봅시다."
민경은 호현을 쪼아 보더니 호현이 시선을 피하자 입을 열었다.
"시준이가 어떻게 돈을 벌었을 것 같아요?"
"그야 블록체인 기술을 팔았을 것이고 비트코인으로 돈을 벌었겠죠."
"아까 제가 세금 이야기를 할 때 표정 보셨나요?"
호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눈을 깜빡였다. 기억을 더듬어 시준의 표정을 떠올렸지만 딱히 기억에 남는 건 없었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 들어봤죠?"
민경의 질문에 호현이 어깨를 으쓱 들어 보였다.
"시준이 저놈은 블록체인 기술을 미끼로 비트코인 투자자를 모집했어요."
"그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저희 아버지도 투자하셨던 걸요. 저도 모르게 하시긴 했지만."
호현은 입맛을 쩍 하고 다셨다.
"예를 들어 비트코인이 하루 십 퍼센트 올랐다고 치자고요. 천만 원 투자해서 백만 원을 버는 것과 백억 원을 투자해서 십억 원을 버는 것을 비교해 보세요. 어차피 같은 기간에 버는 거라면 백억 원이 효과적이겠죠?"
"당연한 거죠. 백억 원이 없으니까 문제죠. 그래서 투자를 받아 비트코인 수익을 만들어 냈다면 오히려 칭찬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거야 벌 땐 칭찬해야죠. 까먹을 땐 어떻게 해요? 비트코인 매입 시기는 또 어떻고요. 정당하게 자기 명의로 코인을 사고팔 땐 문제 삼을 것도 없어요. 하지만 누군가 투자금을 모아서 대리로 투자를 했다면 어떻게 해요? 특히 초기의 비트코인처럼 대중성 없고 접근하기도 어려운 시장이었다면요."
"그럼 민경 씨 의견은 김시준 대표가 불법을 저질렀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확실한 증거 같은 게 있나요?"
호현의 질문에 민경은 잠시 뜸을 들이다 코웃음을 치더니 입을 열었다.
"증거는 역시 차고 넘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