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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파고 Mar 24. 2023

8화, 김 피디의 제안

민경은 출근시간대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밖으로 나왔다. 이른 오전 시간에 거리를 돌아다닌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 길 건너 카페에서 호현과 만나기로 했다. 이제 횡단보도만 건너면 된다.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얼굴을 절반은 어버릴 것 같은 짙은 색 선글라스를 썼지만 누가 봐도 춘자였다. 그렇게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대낮에는 그런 복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민경은 상관없다고 주장했지만 부모님과 매니저의 잔소리는 이가 갈릴 정도로 지겨웠다. 예기치 못할 사고가 발생할 것도 아니고 걸그룹처럼 극성팬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걱정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카페 창 안쪽 깊숙한 곳에 호현의 모습이 보였다. 덩치가 크기도 하지만 머리도 남들보다 커서 멀리서도 잘 보였다. 호현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민경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팔을 길게 뻗쳐 손을 흔들었다. 민경은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호현은 민경이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를 주문해 둔 상태였다.

"고마워요."

민경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라테를 한 모금 호로록 마셨다. 호현은 민경의 모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제안도 고마워요."

호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메말라 가던 기획력 때문에 고민을 하던 차였다. 그래서였을까? 비트코인과 관련한 범죄들을 파헤치는 데 집중하면 대박을 칠 거라고 기대했었지만 소재가 바닥을 치는 상황이었다. 기획 당시에는 시준을 잘 활용해서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을 끌어낸 다음 비트코인 관련된 사건들을 하나씩 풀어가고자 했었다. 그런데 막상 시준을 방송에 내보낸 후엔 갑자기 생각이 바뀐 것이다. 민경은 시준이 얄밉기는 했지만 의도적으로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투자금을 받아서 편취한 것도 아닌데 나쁜 캐릭터로 인식시키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물론 호현의 지적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유명 방송을 무기로 시준을 괴롭히는 건 마녀사냥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것도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호현은 민경의 생각을 읽고 있었던 것처럼 이 시기에 가장 적당한 아이템을 꺼냈다. 호현의 아이템 속에는 민경이 알지 못했던 비트코인 비화들이 비일비재했다. 호현은 더불어 사건으로 접수되었지만 차일피일 시간만 미뤄지며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도 많다고 했다. 이를테면 ICO 가능성도 미비한 전자화폐를 판매한 후에 잠적해 버린 다단계 투자사기 사건이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전자화폐 2차 거래소에 상장시켜 투자자를 안도시킨 후 잠적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런 사건이 국내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호현의 말로는 의외로 해외에서 벌어진 대형 사건도 많다고 했다. 대개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에 대한 전문지식이 없기 때문에 트렌드를 탄 비트코인은 사기 사건에 유용한 아이템이 될 수 있었다. 투자자들은 자신들의 투자처는 최신 IT기술을 기반으로 했고, 차세대 금융이 될 수밖에 없으며, 최단기간에 엄청난 고수익을 가져갈 수 있다고 자신했다. 투자자를 유치하는 사람들은 기존에 보도된 바 있는 비트코인 대박 난 투자 사례들을 제시했다. 한 술 더 떠서 최첨단 금융시스템의 프런티어가 될 것이라며 투자자를 설득했다. 느려 터진 블록체인 암호화 시스템을 개선한 이더리움 등의 새로운 암호화 기술이 개발되자 많은 투자자들은 우르르 관심을 돌렸지만 대부분 개념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기술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대개의 투자자들은 매번 새로운 개념의 암호화폐에 투자했다. 특히 초반엔 기술의 기준도 모호했다. 암호화폐 자체가 기준이 없다고 볼 수 있는 시기에는 말도 안 되는 암호화폐들이 수도 없이 탄생했다. 다들 그럴싸한 기술을 선전하고 있었지만 모순 투성이에 불완전한 기술이었다. 그런데 누군가에 의해 완벽함으로 둔갑되곤 했다. 암호화폐와 관련된 투자는 다양한 형태로 파생되기 시작했다. 허공에 뜬 것 같은 불안한 암호화폐들을 현금화할 수 있다는 개념을 만든 자들도 있었다. 투자자들에게 투자 안정성을 확보해 주겠다는 차원에서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투자금은 친환경적이며 사회적인 곳에 전자화폐를 재투자한다는 명목으로 변이 됐고 증발했다. 새로운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전자화폐에 투자했다고 자신하는 투자자를 눈속임하는 데 있어 그보다 좋은 포장은 없었다. 전자화폐는 형식상으로는 태양광발전 등 친환경에너지, 광물개발, IT기업 등에 투자하여 수익을 창출한다고 선전했다. 전자화폐를 구매한 투자자의 원금을 보장하는 대안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결과적으로는 전자화폐 기술 개발사에 투자한 것인지 사모펀드 개념의 전자화폐 대체 투자사에 투자한 것인지 불분명한 상황이다.

"문제는 자료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호현의 설명을 듣던 민경은 입맛을 다셨다.

"어허~ 제가 누굽니까?"

"네?"

민경은 갑자기 잘난 척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호현을 보며 황당함을 보였다.

"잊고 계셨나 본데요. 저 잘 나가는 김 피디입니다. 맨날 조수처럼 부려먹더니 이제는 제가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가 보네요?"

아~ 민경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었다. 이제야 기억난 것이지만 호현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피디 중 한 명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민경은 <춘자의 취미생활> 정규방송 제안을 받으며 만났던 호현을 기억 구석에서 끄집어냈다. 키도 크고 말끔한 얼굴에 하회탈 같은 미소 자체가 표정이었다. 처음엔 민경을 만나는 자리라 불편함을 누르기 위해 억지로 웃는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의 얼굴을 마주치면 화가 나도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래서였던가? 촬영장에선 누구도 큰소리를 치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팀원들을 묘하게 융화시키는 것도 그의 여러 능력 중 하나였다. 그날 호현은 세 페이지 짜리 계약서를 춘자에게 디밀었다. 전화통화로 대충 설명은 들었지만 첫 만남부터 계약서를 내밀 줄을 몰랐던 것이다. 민경은 무엇에 홀린 듯 사인을 했고 한 달도 안 되어 정식으로 정규방송에 정착했다. 당시 김 피디 호현은 민경에게 여러 가지 제안을 했지만 제정신을 찾은 후라 하나도 수용하지 않았다. 피 터지는 논쟁이 한 달 가까이 진행됐지만 호현의 얼굴에서 불편한 기색을 느낀 적은 없었다.

"설마요. 우리 김 피디님이 누구신데요. 그래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신데요?"

"그보다 고맙다는 말이라도 한 번 해주면 좋겠는데..."

호현은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디님. 정말 진심인데요. 정말 고마워요. 사실 고맙다는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쳤는데 그렇게 요구하시니 오히려 민망하네요. 솔직히 암호화폐 관련해서 어렵게 끌고 오기는 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피디님 아니었으면 답도 없는 고민만 했을 것 같아요. 말씀하신 아이디어는 저도 생각했던 것이긴 한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서 뜬구름 잡는 것만 같았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민경은 말 끝부분부터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내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이러시라고 한 건 아닌데, 우리 춘자 씨 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불안하게."

"불안하게 하려고 하는 건데요."

민경의 표정을 읽은 호현은 민경이 어떤 제안을 할지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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