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신문배달을 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 근처의 신문보급소를 찾아가 내 아들에게 일 좀 시켜달라고 부탁했고, 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나를 채용했다.
그날 처음 봤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도 제법 있었고 아저씨가지 연령대가 다양했던 기억이다.
신문배달 첫날, 각자 맡은 분량을 배급받은 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광고지를 삽지 한 후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달렸다.
그날 삽지방법과 신문을 파지 하는 방법을 배웠는데 매우 서툴러서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도 난다.
내게 한 구역을 내어주기 위해 전에 구역을 담당하던 사수와 이틀 정도 같이 다니며 신문배달 코스를 익혔다.
혼자서 신문배달을 하던 날, 코스를 잃을까 기억을 더듬었지만 역시 놓친 집이 있어서 소장에서 꾸지람을 들었다.
사수는 여분의 신문을 챙겨가서 혹시나 싶은 곳에 투입하라고 했다.
신문을 보지 않는 집에서 신문을 받아보고 나중에 자동으로 구독자가 되는 경우도 있으니 나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대문 안쪽에 키우는 커다란 진돗개에 놀라 먼발치에서 담장 너머로 신문을 던져야 했던 적도 있었다.
미리 나와서 신문을 받아가는 사람도 있었고 그 새벽에 어딜 가는지 길거리에서 신문을 사가는 사람도 있었다.
그건 오롯이 내 몫이라고 했다. 완전 운이었다.
우유배달 하는 사람과 코스가 겹친 적도 있었는데 한 번은 어린 나이에 기특하다며 우유를 얻은 적도 있었다.
먹으면서 하라며 먹을 걸 주시던 아주머니도 기억난다.
그렇게 한 달째 신문배달을 하고 몇천 원인가, 천 원 남짓인가 기억나지 않는 돈을 받았는데 그 돈을 받아 쥔 손에서 땀이 났다.
그날의 내 평생 처음 노동으로 돈을 벌었다는 '보람'을 느낀 날이었다.
난 그 돈을 엄마에게 드렸다.
당연히 얼마는 내게 돌려주셨지만 그게 얼마였든 내겐 관심이 없었다.
나도 집에서 뭐 하나라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기쁨 때문이었던 것 같다.
42년이나 지난 일인데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건 어린 내게도 깨나 신선한 경험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나이를 먹고 보니 그 어린 시절 느꼈던 노동의 보람이 그때보다 못한 것 같고, 집안에 한 푼 더 보탰다는 기쁨을 느꼈던 어린 그때와 달리 집에서 뭔가 자꾸 꺼내가기만 했던 것 같아서 아쉽고 죄송한 마음뿐이다.
대부분 쓸모 있는 자식이 되어 사는데, 나만 못난 자식 같다는 생각이 든다.
50 즈음에... 아직도 철이 들지 못한 것 같다.
<사진 출처> 서울신문 [DB를 열다] 1964년 신문팔이 소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