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끊을 수 없다면 줄여라

절주 그리고 10일

by 루파고

술을 끊겠다고 작정을 한 첫날은 일부러 사람도 만나지 않고 술을 참았다.

한 방울도 입에 술을 대지 않은 것이다.

영광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다.

내 의지로 술을 참았으니 말이다.


개가 똥을 참지!


내가 술을 끊겠다는 말을 하자 제일 먼저 터져 나온 말이다.

처음에는 술을 끊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어 많은 고민 끝에 절주로 생각을 돌렸는데 주변 사람들은 내 의지를 믿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주야장천 마셔온 술을 끊겠다는 대주가이자 애주가인 나의 단언이 농담처럼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술을 멀리 하고자 하는 내 속내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평생 100년을 산다 하더라도 이제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은 인생을 술에 취해 흥청망청 날려버리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 것이다.

이제 마실 만큼 마셨고 놀만큼 놀았으니 하고자 했던 것들을 성취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인생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생각을 곧장 실천에 옮겼고 첫날부터 내 의지를 흔들 목적의 강한 공격이 들어왔다.





절주 2일 차, 나는 제일 먼저 책을 한 권 샀다.


마침 <8월의 크리스마스> 원작자이자 사부님이신 허수정 작가님의 추천작인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소설을 구입했다.

일본의 신인 작가인데 내가 주력으로 쓰는 미스터리 분야에 돌풍을 일으켰다며 참고서로 추천하신 것이다.

마침 아침부터 약속이 잡혀있어 신논현역 교보문고로 향했다.

최근 업무가 바쁘기도 했지만 자전거 타랴, 사람들 만나랴, 술 마시랴 손에서 책을 놓은 지가 벌써 수개월은 된 것 같았다.

이 참에 다시 부지런히 독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오랜만에 들른 서점에는 평소 보지 못한 책들이 보였다.

자주 가던 서점이라 눈에 익은 표지들이 더 많았던 기억인데 대개 생소해 보였다.

연말이라 트렌드에 관한 책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평소 같으면 또 몇 권씩 사들고 나왔을 테지만 이번에는 <돌이킬 수 없는 약속> 외에도 몇 권을 손에 들었다 놨다 했다.

마침 약속 시간까지 여유 있게 나온 터라 이번에는 서점에 마련된 테이블에 김난도 작가의 트렌드 서적을 훑었다.

어차피 사게 될 책이지만 말이다.


약속시간이 되어 약속 장소인 길 건너편 원주추어탕 식당으로 향했다.

몇 번 와본 곳인데 아점으로 딱 안성맞춤인 곳이 아닌가 싶다.

오래된 집이란 건 간판만 봐도 알 수 있는 맛집이다.


저녁에는 절주 의지를 꺾을 위기의 공격인 송년회가 약속되어 있었다.

유명한 맛집에서 소주를 부르는 메뉴를 앞에 두고 과연 참을 수 있을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다녀온 곳이라 술과 별개로 생각할 수 있는 안주가 아니라는 게 기억 속에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맥주만 마시기로 했다.

초반부터 의지가 꺾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내일부터 하지 뭐~'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걱정도 됐다.

다행인지 송년회 참가자는 5명이었는데 그중 2명만 애주가였다.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부어라 마셔라 소주를 마시던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니 다들 술맛이 나지 않는다며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였는지 술자리는 아주 간소하게 종료됐다.

다른 때 같았으면 2차, 3차 심지어는 4, 5차까지 이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결과는 어땠을까?

2차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와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헤어졌다.

어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모처럼의 송년회 자리에서 실컷 웃고 떠들며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절주를 시작했다는 나 때문에 싱겁게 끝난 것이 아닌가 해서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송년회를 파하고 집에 들어가니 술기운도 전혀 없고 편했다.

맥주를 마시니 배가 불러서 안주도 많이 안 먹게 됐다.

속도 편하고 해서 모처럼 사온 책도 읽으며 잠이 오기를 기다렸는데 정신은 말똥말똥했다.

원래 새벽이나 되어야 잠을 자는 편이지만 매일 마시던 술을 줄이니 잠도 오지 않았다.

그전까지는 아마 술에 취해 잠을 잔 것이지 정상적인 잠을 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기절한 것이다.

다음날 일도 있고 하니 불을 끄고 누워서 억지로 잠을 청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고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를 돌리다 보니 어느새 잠이 든 것 같다.




절주 3일 차 아침.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는데 머리는 맑고 몸도 가뿐하다.

오랜만에 생각지도 못한 느낌이다.

거의 매일 술을 마시며 살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약간은 생소한 기분도 들었다.

기분 탓이었던 걸까?


이번에도 아점이다.

원래 아침을 잘 챙겨 먹지 않는 편이었는데 모처럼의 돈가스는 아점 메뉴로 나쁘지 않았다.

술을 마신 다음 날(매일이지만)엔 국물이 있는 음식이 당기기 마련이었는데 첫 식사부터 돈가스라니.

하지만 전혀 부대끼지 않았다.

물론 나는 워낙 강철 내장이라 아무리 술을 마셔도 다음날 속 부대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남산에서 내려와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고 오후 업무를 마쳤다.

저녁에도 중요한 약속이 있어 여차하면 술자리까지 이어질 판이었다.

절주를 머릿속에 넣고 지내다 보니 매일의 일과를 다시 생각해볼 계기가 되었다.

사람 만나는 게 일은 아니지만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술자리가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낮다.

내가 영업을 하는 사람도 아닌데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술을 마셨을까?

술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버릇이나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알코올 중독증일 거라고들 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던 게 저녁이 되면 언제나 술자리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을 털어 나만큼 술을 마시며 산 사람도 많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거의 매일 소주 3병 이상 마셨고, 밖에서 마신 양이 차지 않으면 집에 가서라도 채우고 살았다.

그야말로 지난밤처럼 술기운에 기절을 한 걸 잠을 잤다고 착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주량도 약하지 않은 나는 거래처나 지인 중에 술을 잘 마신다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든 술로 승부를 냈다.

그렇게 해서 친해진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술친구는 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에는 청계산 입구에 있는 장수촌에서 오리탕을 주문했다.

식당 종료시간이 되어 10시에 자리를 이동하고 새벽 2시까지 이어진 미팅이었는데 맨 정신이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더디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마도 술자리에서 돌아가는 시간과 일상에서 돌아가는 시간은 감각적으로 다른 느낌이 분명하다.





절주 4일 차.


토요일 아침, 전날 새벽 3시가 다 되어 잠이 들었는데 역시 정신이 멀뚱멀뚱하다.

오전에 짧은 업무가 있어 후다닥 일을 본 후 집으로 돌아와 자전거를 끌고 기어 나왔다.

지인에게 올인원드립장비를 전해주어야 하는데 주중 내내 너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주섬주섬 자전거 복장으로 갈아입고 배낭에 드립장비를 넣고 나와 만날 장소를 정하는데 마침 광화문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혼자 남산으로 향했다.

그런데 반포대교 근처에서 체인이 끊어지고 말았다.

지난주 팔당에서 체인이 뚝 끊어졌던 것을 임시방편으로 채워 두었는데 결국 사망한 것이다.

급한 마음에 저렴한 체인으로 교체하고 다시 출발했다.

PR(Private Record:개인 기록)을 갱신할 생각도 없고 해서 천천히 올라가니 숨도 차지 않았다.

기록은 8분대.

처음 자전거를 타던 때를 생각하면 너무 쉽게 타는 것 같다.

현재 체중이 91.5kg인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싶다.

참고로 내 PR은 6분대다.

당시 체중은 89.5kg이었으니 지금과 별 차이는 없다.

겨울로 접어들며 PR을 갱신한 후 한 달 사이에 3kg이나 불었다.

운동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광화문은 각종 집회로 인산인해였다.

욕설이 난무하는 스피커가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길도 건너기 힘든 판이었는데 자전거를 끌고 사람들을 피해 대로를 건너는 사이 바퀴에 바람이 전부 빠져나간 것을 알 수 있었다.

펑크가 난 것이다.

약속 장소까지는 약 400미터 정도.

나는 클릿슈즈를 신은 상태로 어그적거리며 자전거를 끌고 걸어야만 했다.


저녁에는 망원동에서 자전거 동호인들과 만나 간단하게 치맥을 했는데 역시 맥주 몇 잔으로 만족했다.

아마 생맥주 세 잔 정도 마신 것 같다.






절주 5일 차, 일요일 아침.


동호회 라이딩 모임이 있는 날이다.

마침 온도가 높아 라이딩 하기에 적절한 날씨였다.

요즘 펑크가 잦은 편인데 지난주에도 펑크가 나서 동호회 형님에게 튜브를 빌렸던 것도 돌려드려야 했다.

아무래도 저렴한 중국산 튜브가 문제였던 듯해서 개당 1만 원 정도 되는 슈발베 튜브를 주문해 두었었다.

하나를 챙겨 나와 탄천합수부에 도착하고 보니 약속 장소는 잠실선착장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탄천합수부를 빠져나가려 방향을 트는 순간 의지와는 상관없이 왼쪽으로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고통도 문제였지만 약속시간에 늦는 것이 더 문제였다.

약속 늦는 걸 제일 싫어하는 성격이라 나 스스로 그걸 못 견딘다.

형님에게 돌려드릴 튜브를 내가 또 사용해야 할 상황인데 문제는 펌프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다 챙겨서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튜브를 갈고 반포로 가서 간단하게 라이딩을 하고 돌아왔다.

오후에는 또 업무상 중요한 약속이 잡혀있었기에 부랴부랴 씻고 튀어나와야만 했다.



업무를 마치고 식사를 하자는 제안에 닭갈비를 안주로 한 술자리까지 이어졌지만 나는 맥주 몇 잔으로 마무리했다.

나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하는 차에 그들은 나 때문에 술맛도 안 난다고들 했지만 그러면서도 잘만 드시더라는.


예전 같으면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날이나, 맨 정신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면 편의점에서 만 원에 네 캔 하는 맥주를 샀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는 한 권에 만 오천 원짜리 소설이 있다.

그날 저녁은 샤워를 하고 맥주 대신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여유였던 것 같다.





절주 6일 차.


역시 아침은 개운하다.

세상의 아침이 원래 이런 맛이었구나 싶었다.

씻고 잠시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었다.

오전에 페이퍼웤 좀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도 시원해서 좋다.

워낙 열이 많아 추위를 잘 타지 않아서 겨울이 되면 컨디션이 최상이다.

마침 동네에서 볼 일이 있어 운동 삼아 걸어서 업무를 보러 다녔다.

저녁에도 조촐한 송년회도 잡혀 있는데 이미 절주 시작했다고 선전포고를 해둔 상태였다.

이미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눈빛이 이상하다.

병이 걸리거나 하지는 않았으니 염려들 마시길.

술을 마시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한 것이니까.

이제 기껏 6일 차였지만 술을 줄임으로 해서 늘어난 시간이 남아돌아 좀 더 활용도 높게 쓰려던 참이다.

게다가 오전에도 머릿속이 맑다.

에너지는 충만하고 생각의 속도가 빠르고 깊어졌다.

술 마시고 전날 기억을 더듬느라 낭비하는 시간도 없어졌다.


홍대에서 송년회를 했는데 1차로 완벽한 술안주를 주문했다.

참치와 삼겹살 둘 다 소주 안주지만 내게는 그냥......

이상하게 술이 당기지 않는다.

아마도 내 의지가 술보다 강한 것 같다.

맥주는 기껏 4잔 정도 마신 것 같다.


2차로 치맥을 했는데 이 날이 절주를 시작한 후로 가장 많이 마신 날이다.

1차, 2차 털어서 약 6잔을 마신 것 같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맥주 6잔으로는 취기도 안 오르는 편이라 내게는 충분한 절주라고 생각한다.

주량에 따라 상대적인 부분인 건 안다.

나도 나름 최대한 홀짝거리며 마셨는데 6시 30분에 만나서 집에 새벽 2시 가까이 들어갔으니 얼마나 긴 시간 동안 맥주를 마신 건지. ^^





절주 7일 차.


아침 일찍 일어났지만 역시 정신 상태는 맑았다.

오전 이른 시간부터 약속이 있어서 나갔다가 오후 두 시 정도에 업무를 마쳤는데 나를 끌고 술집으로 향하는 모습이라니......


그동안 나의 모습은 언제라도 술을 마실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분명히 나는 맥주 정도의 약한 술 외 다른 술은 마시지 않는다고 공표했고 역시 그렇게 됐다.

예상했던 대로 상대는 혼자 취해가야 하는 상황인지라 술자리는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술자리는 파했다.

점점 사람들이 내게 적응을 해가는 것 같다.

이제는 나이도 제법 차서 그런지 어릴 때처럼 술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대학 때 맞아가며 억지로 술을 마시다 지금에 이르게 된 나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이러니 아닐 수 없다.

그놈의 술이 뭐가 좋다고 매일같이 악착같이 마셨던 것일까?





절주 8일 차.


이제는 맑은 정신으로 시작하는 아침이 익숙해져 있었다.



역시 아점으로 첫 끼니를 시작했다.

평소 초밥은 술을 부르는 메뉴였는데 술에는 관심조차 없다.

인간이 변해도 이렇게 변해도 되는가 싶기도 하다.


저녁식사도 술을 부르는 메뉴였지만 절대 술을 찾지 않았다.

하마터면 술을 찾을 뻔했다.

맥주라도 마셔야 될 것만 같은 메뉴 때문이었다.

아직 술에서 완전히 헤어 나오는 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주에서 절주로 생각을 돌리긴 했지만 아직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은 듯했다.


생갈비에 생가오리찜, 양념게장은 술을 부르는 메뉴가 확실하다.

여기에는 술을 주문하는 악마의 저주가 녹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참아냈다.

나는 이기고 말았다.


하지만 집에 돌아온 나는 드디어 맥주 두 캔을 개봉하고 말았다.

다행인 건 5캔에 12,000원 하는 걸 사 가지고 들어와서도 2캔만 마신 거다.

더 이상은 입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나 스스로 그렇게 대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 술을 들이지 않겠다고 작정한 나와의 약속을 깨고 말았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양호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절주 9일 차.


삼성동 이남장에서 설렁탕으로 아점을 때웠다.

이남장은 항상 술을 마시러 다니는 집이었는데 술안주를 주문해 두고 밥만 먹고 나왔다.

내 속에 있는 어떤 놈과 매일 대결하는 기분이었다.

예전의 나였으면 반주라도 걸치고 시작했어야 하는 아침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화려한 이 술안주를 두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

물론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소주 한 잔만이라도 걸쳤으면 하는 내 속의 아주 간지러운 느낌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저녁에 잡혀있던 송년회가 가장 큰 걸림돌이긴 했다.

기필코 내게 소주를 먹이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그들 사이에 내기까지 걸어야겠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소식은 내게 오기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하는 생각인 거다.


생참치, 방어, 도미, 히라스, 고등어 등 어지간한 건 다 차려놓고도 나는 맥주만 마셨다.

요즘 술을 줄이면서 전에 없던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

원래 양이 많지는 않은 편인데 양이 더 줄어든 것이다.

모르긴 해도 알코올은 뇌를 마비시켜 배가 부른 느낌도 마비시키는 게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평소보다 양이 더 줄어들 이유가 없을 것이니까.

그날 자리에서도 내가 술을 마시지 않아 재미가 없다는 평이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절주를 시작하고 9일째.

나는 너무 행복하다. ^^

왠지 주변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나의 달라진 모습을 자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들은 나처럼 하지 못하니 말이다.

적어도 이제는 강제로 술을 권하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만 자제한다면 얼마든지 절주가 가능하다.





절주 10일 차.


운동을 해도 줄어들지 않는 나의 체중은 낙천적인 성격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칼로리가 높은 술을 매일같이 마시며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체중이 약 500g 정도 줄었다.

절주를 시작하기 전 91.5kg이었는데 지금은 옷을 입고도 91kg이다.

딱히 심한 운동도 하지 않았고 평소보다 라이딩을 많이 하지도 않았다.


아점으로 불고기를 먹었다.

잘 먹어야 든든하다.

아침을 거르고 점심을 든든하게 먹으면 하루가 편하다.

난 원래 하루 두 끼 먹는 사람이다.

문제는 저녁 식사가 술이었다는 것이다.

단주가 아닌 절주지만 적당한 술은 소화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기는 하다.

아침은 즐겁기만 하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아 문제지만 잠이 오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있어 좋다.

삶을 좀 더 알차게 살 수 있다는 점이 제일 좋고 몸에서 술냄새가 나지 않아 좋다.

이른 시간 지하철을 탈 때면 옆자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어 서서 다니는 편인데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미안했었다.

하루가 길어져 시간이 넉넉해졌다.

이 글도 11일 차 토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두 시간째 쓰는 거다.

점심에 미팅이 잡혀있어 또 나가봐야 하는데 아직도 시간이 넉넉하다.


절주를 통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난 것 같지만 사실 잊었던 지난 어린 시절이 이랬을 것이다.

그간 술로 보낸 시간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을 사귄 것도 있으니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적당한 음주로 끝내면 좀 더 멋진 삶을 꾸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과거는 과거이고, 이제는 앞으로 지금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꾸준히 이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글에 나온 음식 사진들을 보면 술을 참아야 하는 고통이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할 것이다.

인생에 피할 수 없는 술자리가 가장 많은 시기에 나의 절주가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술을 참을 수 있었던 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추려 보자면 이렇다.

그간의 시간이 너무 아까웠다.

술에 낭비하는 돈이 또 아까웠다.

술로 인해 소비되는 불필요한 돈도 아까웠다.

남은 인생을 이대로 보내긴 싫었다.

내 몸에서 나는 술냄새가 싫어졌다.

하루에 쓸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밤에 일어난 일을 복기하는 데 쓰는 시간도 싫고 기억도 싫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남 탓, 시간 탓, 돈 탓을 하기 싫어졌다.

내 의지를 비웃는 사람들에게 나를 보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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