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4-박수의 사연

by 루파고

"어? 이상하네. 누가 다녀간 것 같아."

묘를 둘러싼 돌담 주변을 정리하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피부가 거칠고 까맣게 탄 얼굴이라 사십 대 중반 정도로 보이지만 이마에 주름 하나 없는 삼십 대 초반의 사내다. 눈이 가늘고 어깨가 곧은 그는 허리를 쭉 펴고 주변을 살폈다. 쭈그리고 앉았을 땐 몰랐지만 꽤 큰 키에 덩치도 한라산만큼 거대했다. 그는 주변을 한 번 더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 후 다시 묘를 살폈다. 그의 손은 묘 주위의 풀을 다듬기 시작했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어멍. 오늘도 평안하신지요? 제발 부탁인데 우리 달래는 그냥 평범하게 살게 해 주세요. 제발 부탁해요. 어멍도 할 만큼 하셨잖아요. 할망도 요즘 예전 같지 않으신지 부쩍 저세상 이야기를 자주 해요. 어멍 보고 싶단 얘기도 하고요. 그런데 자꾸 달래를……. 자꾸 달래를……."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흐느낌으로 옮겼고 심지어는 목 놓아 울게 했다. 그는 철퍼덕 주저앉아 동그란 봉분 옆에 세로로 길게 박힌 비석을 매만졌다. 제주에는 없는 돌로 만든 비석이다. 방금 닦은 것처럼 반짝반짝 윤이 나는 묘한 돌이다. 비석에는 '박수명수의 어멍'이라고 음각으로 파여 있었다. 박수는 누이인 명수를 데리고 제주를 떠났었다. 명수는 일본에서 알 수 없는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박수는 누이의 시신을 고향으로 데려오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대마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제주에서 멀어질수록 명수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누이는 이상하게 변해갔다. 전에 없던 헛소리를 하고, 가끔 발작을 했다. 심지어 거품을 물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한 번은 처음 보는 일본인 여자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하다가 싸움이 나서 좇기는 신세가 된 적도 있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일본에서의 생활은 피폐하기 그지없었다. 가져간 돈은 이미 다 바닥난 상황이었다. 누이의 증세는 하루가 다르게 심해졌고 박수는 누이를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이는 점점 미쳐갔다. 가끔 정신이 돌아오긴 했지만 그때마다 할망을 찾곤 했다. 제주에서 떠나오면 할망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할망의 그늘을 피할 수 없었다. 다시 제주로 돌아갈 고민을 할 무렵이었다. 누이 명수는 남의 집 창고에서 목을 매달았다. 제주에서 나올 때 갖고 있었던 고운 명주옷을 입은 채였다. 할망의 예언에서 벗어나겠다며 제주에서 도망쳐 나왔던 박수와 명수는 결국 벗어나지 못했다. 명수가 죽은 후 박수는 일 년 넘게 일본을 배회했다. 먹는 것도, 자는 것도 되는 대로 살았다. 입는 것도 벗는 것도 몰랐다. 옷이 해지는지, 벌거벗었는지도 몰랐다. 신발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머리는 물론 온몸 어디에서도 정상인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떤 마을에선 불쌍케 여겨 밥을 주기도 했고, 어떤 마을에선 돌에 맞아 정신을 잃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배회하던 어느 날 누이 명수가 꿈이 나타나 고향으로 돌아가라 했고, 박수는 다시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박수는 자신이 어떻게 제주로 돌아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정신을 잃고 헤매던 것처럼 그저 본능처럼 걸었을 뿐인데 고향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황당한 것은 박수가 집에 도착한 날 할망이 데려온 처자였다. 아내가 될 여자였다. 도지라는 이름은 '초겨울의 산바람'을 뜻하는데, 태어나던 날 마침 거센 찬바람이 불어 도지라 지었다고 했다. 누이 명수도 미인이라면 미인인데 잘 산다는 일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예쁜 여자가 박수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작은 키에 동그란 눈을 가진 소담한 여자였다. 박수는 혼이 날아갈 정도였다. 둘은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이 혼인을 했고, 아이를 가졌고, 또 아이를 가졌다. 기정과 달래였다.

*

박수는 어멍의 비석을 매만지며 누이 명수를 떠올렸다. 천사 같던 누이가 당장이라도 앞에 나타났으면 싶었다.

"어멍! 왜 그랬어요? 누이를 꼭 그렇게 데려가야만 했어요? 어멍 때 끝냈어야 했어요. 왜 할망의 맥을 계속 이어야 하는 거냐고요? 세상이 바뀌었어요. 귀신같은 건 없단 말입니다. 이제 귀신도 잡아 가둘 수 있는 세상이 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우리 달래까지 데려가려고 하냐고요! 누이 하나면 충분하잖아요."

박수는 절규했다. 한동안 참았던 게 터진 듯했다.

*

봄이 깊어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볕이 뜨거워지는 시기다. 여름이 코 앞인 듯했지만 이제 기껏 사 월 초순이었다. 박수는 무려 스물네 뿌리나 되는 산삼을 가지고 장터로 향했다. 주성장은 제주에서 제일 큰 장이다. 박수는 약초꾼으로 살게 된 이래 이렇게까지 큰돈이 되는 수확을 해본 적이 없었다. 몇 년 먹을 곡식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박수는 겨우내 먹을거리를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뻤다. 든든한 기정과 어멍을 닮아 예쁘고 귀여운 달래의 선물도 사줄 수 있다. 사랑하는 아내 도지를 위해 예쁜 장신구도 사줄 수 있었다.

박수는 마땅한 좌판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다 비쩍 마른 할망 옆에 자리를 잡았다. 눈치가 있었던지 박수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엉덩이를 비켜 공간을 내어준 것이다. 박수가 좌판에 산삼 한 뿌리를 올려놓자 할망이 놀라는가 싶더니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고 약초꾼들이 모인 자리를 알려주었다. 게다가 손가락으로 약초 거간꾼도 일러 주었다. 박수는 할망 덕분에 거간꾼과 쉽게 거래를 마쳤다. 게다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수입에 한없이 만족스러웠다. 박수는 곧장 미리 점찍었던 선물들과 소금에 절인 고기와 말린 생선 등 그동안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것들을 한 무더기 사서 지게 위에 묶었다. 평소와 달리 이번엔 산삼만 팔러 왔다. 올 때보다 짐이 불어났지만 혼자라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해가 뜨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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