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은 길고도 짧고, 짧고도 길다. 겨울이라지만 숲은 푸르름을 잃지 않았다. 땅엔 언제나 파란 풀이 자랐다. 사람 키만큼 눈이 내려도 며칠이면 언제 눈이 왔던가 싶을 정도로 흔적 없이 녹아내렸다. 깊은 산이 아니면 찬바람이 드는 풍혈에나 가야 얼음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추운 날, 바람결을 따라 흙과 결을 이룬 뾰족한 얼음이 땅을 뒤덮기도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해가 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녹아내리고 없었다. 그렇다 해도 제주의 겨울을 따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오름 곳곳에 자리 잡은 묘를 둘러싼 산담 안에 세워둔 동자석이 이름 없는 묘주인을 수호하며 영혼의 시중을 들고 있다. 산담 앞에 시문을 열어 둔 묘 두 개는 부부의 묘다. 남자의 묘는 왼쪽에, 여자의 묘는 오른쪽에 시문을 열어 두었다. 부부의 영혼은 수시로 시문을 열고 나와 지난 아름다웠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부부의 묘 위에는 대형 산담이 설치된 누군가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마치 왕의 묘인 양 위엄이 느껴진다. 오래전 위세 떨치던 사람의 묘가 분명하다.
가파른 경사는 아니지만 한라산 자락의 숲이 많이 우거진 중산간이다.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깊은 초목 속에 그들의 오막살이 돌집만 덩그러니 있다. 일부러 찾아가려 해도 쉽지 않은 위치인 데다,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다. 겨울이 되어 활엽수 이파리들이 떨어지면 숲 속에 집 비슷한 게 보이긴 했다. 겨울이 지나면 금세 가시덤불이 우거졌고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을 거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가끔 할망에게 기도를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 외엔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부러 폐쇄적인 장소에 집을 짓고 세상 사람들과 등진 채 숨어 사는 것만 같았다.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할망의 표현대로 할망의 할망, 또 그 할망의 할망이라도 모를 것이다.
그 집 근처에 마을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십 리가 훨씬 넘는 거리였고 기껏 서른 명이나 사는 정도로 작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 가족과 가까이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을의 괜당 안에 그들 가족은 포함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도 친척 관계가 될 수 없었다. 어떤 사람들은 도깨비를 모시는 미친 사람들이라며 손가락질했다. 그들 가족과 어울려 살면 좋으련만 몇 사람을 제외하면 서로 알지 못했다, 그 마을 역시 약초를 캐며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박수가 산에서 캔 약초들을 굳이 삼십 리가 넘는 곳까지 가서 내다 파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매년 봄이 되면 겨울에 먹을 양식을 비축해야 했다. 기정과 달래가 마을 사람들을 본 건 기껏 열 번도 되지 않았다. 최근에는 숲에서 더덕을 파다가 마을의 또래 아이들 세 명을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같은 또래라는 금세 친해져 몇 번 어울리긴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아이들을 볼 수 없었다. 기정은 아이들을 통해 학교라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곳엔 또래 친구들도 많고 세상의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했다. 아방은 때가 되면 세상을 만날 수 있게 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기정은 영원히 숲에 갇혀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당에는 몇 사람이 함께 안아야 간신히 손이 닿을 정도로 둥치가 큰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할망은 그녀의 할망, 또 그녀의 할망, 또 그녀의 할망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전 할망이 심었다고 했다. 적어도 천 년은 훌쩍 넘은 나무라고 했다. 하지만 나무는 지금도 계속 자라는 듯 새싹도 잘 자라고 껍질도 건강했다. 앞으로 천 년은 더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정과 달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름드리나무 아래 둘러 싸맨 알록달록한 띠를 보며 살아왔다. 할망은 그 띠가 제주를 지켜주는 설문대할망과의 교감을 잇는 것이라 했다. 아이들은 그저 신성한 것, 혹은 수호신 같은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다.
지난주 내린 눈이 올 겨울의 마지막 눈이었던가, 갑자기 찾아온 포근한 날씨에 인근 수풀엔 벌써 생기가 살아났다. 꽃망울도 피고, 찔레꽃 새싹도 빠르게 텄다. 다래나무엔 새싹이 자라 나물용으로 뜯기 좋을 정도로 자랐고, 숲 속 깊은 곳 양지바른 곳엔 곰취가 군락을 이뤘다. 겨울 같지 않은 겨우내 숨통을 누르고 눈치만 보던 버섯들도 빼꼼히 고개를 치밀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새벽에 내린 이슬 위로 쏟아지자 하얀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아침 햇살이지만 벌써 볕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오름에 익숙하지 않은 움직임이 있었다. 처음엔 한 사람인 듯했지만 한 사람, 또 한 사람이 나타났다. 한참 동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뭐라고 속닥이더니 다시 한 사람, 한 사람 사라지고 없었다. 동이 튼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이른 시간, 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