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5-명수의 부활

by 루파고

박수는 지게끈을 바짝 동여 맸다. 도두리를 벗어날 무렵부터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자꾸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살면서 이렇게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는 박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산삼을 팔아 받은 돈은 천으로 여러번 싸서 가슴팍 안쪽에 꽁꽁 동여맨 후 어깨까지 가로질러 두른 상태였다. 제주 군민을 키와 체구로 줄을 세운다면 앞에서 백 번째 안에는 들어갈 만큼 건장하고 힘이 좋은 박수지만 큰 돈을 쥐고 보니 세상 모두가 두려운 존재로 느껴졌다. 박수는 작은 눈으로 사방을 끊임없이 살폈다. 도두리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사람이 많아서 불안함이 심했던 그는 인적이 드물어지자 가까스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누구에게도 해코지를 당한 적이 없었는데 그깟 재물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한 자신이 영 탐탁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미쳐 오솔길을 걷던 박수의 눈에 인파가 늘어나는 게 보였다. 어느새 관덕정 근처까지 온 것이다. 멀리 몇백 미터 앞에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었다. 왠지 예삿일 같지 않아 보였다. 사람들 표정이 보일 정도로 가까워지며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명확하게 들렸다.

"왜 우리 하르방을 잡아갑니까? 왜 그런지 말을 해줘야지, 무턱대고 잡아가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합니까?"

오십은 넘어 보이는 할망이 인파를 파헤치고 들어서며 소리쳤다. 호기심이 발동한 박수는 가슴팍에 묶어둔 돈뭉치를 한번 더 여미고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적어도 백여 명은 넘게 모인 듯했다.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박수는 군중들 뒤에 섰어도 안쪽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박수 앞에 선 사람들은 뒤쪽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운 걸 느끼며 소스라치게 놀라 비켜섰다. 박수는 연신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여야 했다. 관덕정의 높은 돌담 앞엔 피투성이가 된 남자들이 여럿 보였다. 모두 무릎이 꿇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꽤 어려 보이는 남자도 있었다. 그들 옆에는 총을 겨눈 군인이 네 명이나 되었고,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혈색에 키만 장대처럼 큰 남자가 이상한 군복을 입고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박수는 소문에만 듣던 미국 군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박수는 이미 일본에서 시체처럼 핏기가 없는 백인과 석탄처럼 새까만 흑인을 여러 번 본 터라 그들이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미국 군인이 조선인을 때리는 게 보였다. 박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일본이 철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번엔 미국인이 일본인이 하던 짓을 하고 있었다. 박수는 제주 사람을 괴롭히는 걸 보니 불쾌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에서 누이 명수와 유랑을 다니던 기억이 떠올랐다.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살피는데 조선 군인 하나가 소총으로 제일 젊어 보이던 남자의 머리를 후려치는 게 보였다. 그는 머리가 터졌는지 피를 뿌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는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를 살피던 군인은 잠시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조선의 얼이 깊은 제주목관아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한 여자가 박수의 허리를 밀치며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박수는 깜짝 놀라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런데 그의 가슴께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여자의 손에 여자 아이 하나가 보였다. 박수는 여자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하얀 피부에 동그란 얼굴, 동그란 눈, 가는 턱, 발그레한 볼 그리고 입술……. 심장이 멈춰버리는 것만 같았다. 누이 명수와 너무나도 닮은 아이였다. 특히 아이의 눈빛은 어린 시절 명수의 눈빛과 같았다.

명수와 아이의 눈빛에서 혼란을 느끼던 박수의 귀에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절규가 이어졌다. 박수는 쓰러진 남자의 아내임을 직감했다. 여자는 바닥에 방치된 남자의 시신을 부여안고 흐느꼈다. 아이는 정신이 빠졌는지 멍한 듯한 자세로 엉거주춤 있었는데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옆으로 쓰러졌다. 선 자세로 혼절한 것이다. 박수는 자기도 모르게 군중을 밀고 아이를 향했다. 사람들은 박수의 힘에 밀려 우르르 길을 열고 말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박수는 이미 아이가 명수의 환생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넌 뭐야?"

군인 하나가 소리쳤다. 하지만 박수의 거대한 덩치에 압도당했는지 목소리는 기어들어가는 듯했다. 상기된 박수의 묘한 표정에서 두려움이 느껴졌던 것이다. 박수는 재빨리 아이를 일으켜 안았다. 다시 봐도 명수의 환생이 분명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박수의 눈에 눈이 뒤집어진 아이 엄마의 모습이 들어왔다. 입에 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여자의 눈빛은 아이를 부탁한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자는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어떻게 죽어가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분명 죽음의 문턱 앞에 있었다.

"아이 엄마를 살려주세요. 죽어가는 것 같아요."

박수가 소리쳤지만 그 누구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박수는 망연자실했다. 그 역시 죽어가는 여자를 살려낼 방법이 없었다. 찰나 여자의 눈은 스르르 잠겨버렸고 영원히 뜰 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남자를 후려쳐 죽였던 군인이 여자의 목에 손을 댔다. 맥을 짚은 모양이었다. 그는 박수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엔 연민과 함께 두려움이 가득했다. 박수는 저도 모르게 숨이 거칠어졌다. 박수의 모습에 살기를 느낀 군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펄쩍 뛰어 달아났다. 박수는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두 눈엔 분노가 팽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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