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은 얼마나 놀랐던지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오름에서 굴러 떨어지는 동안 돌부리에 찍혀 다친 것도 모른 걸까 싶었다. 상체를 숙여 기어가던 기정은 움직임을 멈추고 뒤따라오던 달래를 돌아보았다.
"피야?"
아직 해가 지진 않았지만 볕이 들어오지 않는 곶자왈의 가시덤불 속에서는 그게 피라고 확신할 순 없었다. 기정의 목소리가 떨렸고 눈치챈 달래는 긴장했다. 오빠가 다쳤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모르겠어. 그런데 피……. 피면 어쩌지?"
달래는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먼발치에서 다시 천둥소리가 들렸다. 쾅! 그리고 더는 들리지 않았다. 기정과 달래는 동작을 멈췄다. 숨이 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달래는 동그래진 눈으로 입을 가렸다. 잠시 후 달래는 딸꾹질을 시작했다. 기정은 재차 몸을 살폈지만 아픈 곳은 없는 것 같았다. 타박상으로 인한 불편함 정도였고 기껏 여기저기 긁힌 상처의 따가운 느낌뿐이었다.
"달래야. 가자! 여기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
기정이 달래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불규칙적으로 딸꾹질을 하는 달래의 숨결이 안타까웠다. 달래의 딸꾹질이 멈출 때까지 쉬면 좋겠지만 기정은 가급적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두 아이는 넝쿨 아래 통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던 통로가 유난히 좁아진 느낌이 들었다. 잠시 후 기정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메스꺼움과 함께 몽롱하고 묘한 느낌에 젖어들었다. 달래의 딸꾹질 소리가 환상처럼 늘어졌다.
기정은 언젠가 비슷한 기분을 느꼈던 걸 기억해 내기 시작했다. 아찔하고 느끼하며 멍청하면서도 온갖 감각은 섬세하게 날이 선 오묘한 그 기분이었다. 아버지가 키가 클 땐 다들 그런 꿈을 꾼다고 했던, 반복적으로 지루하게 괴롭히던 꿈에서의 느낌이었다. 될 듯하면서도 안 되고 잡힐 것 같으면서도 안 잡히던 모래밭 속 모래알갱이를 잡아 쥐려던 꿈속 기억이 아주 조금 떠올랐다. 묘하게도 꿈과 다른 황홀함 같은 게 느껴졌다.
*
모래 알갱이가 손에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였다.
"하르방! 하르방!"
왠지 익숙한 얼굴인 듯한 모르는 두 아이가 하르방의 슬하에 달려들었다. 맑고 까무잡잡한 피부에 말도 못 하게 귀여운 아이들이었다. 하르방은 두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그런데 그 예쁘고 귀엽던 아이들이 모래처럼 무너져 내리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바닥은 온통 검은 화산모래뿐이었다.
*
"오빠~"
손에서 모래 알갱이가 흩어지는 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달래가 흐느끼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머릿속을 흔들어대는 알 수 없는 느낌은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다.
"달래야. 오빠 괜찮아. 잠시만……."
눈두덩이가 무거운 느낌이었다. 억지로 눈을 떴지만 눈앞에 보이는 건 흐릿한 달래의 모습뿐이었다. 달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기정의 팔을 잡아 쥐고 흔들었던 손에서 힘을 풀었다.
"죽은 줄 알았단 말이야."
"잠시만 이렇게 있을게. 괜찮을 거야."
심한 몸살에 며칠을 누워 있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와 비슷했다. 이불 밖으로 기어 나오며 쉰내 나는 땀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났다. 마치 짧은 몸살을 앓았던 것처럼 두통이 가시지 않았다. 정신은 아직 몽롱했지만 시야는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몸이 맘대로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달빛 별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시커먼 덩굴 속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는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달래야. 내가 얼마나 이렇게 있었던 거야?"
"모르겠어. 오래된 것 같아. 할망이 걱정하실 텐데. 천둥소리도 몇 번 더 들렸었어."
"오빠! 아까 피 난 거……. 그건 지금 어때?"
"아프지는 않아. 심하게 다친 건 아닌 것 같아. 잠시 쉬면 괜찮을 것 같으니까 곧 집으로 돌아가자. 할망하고 어멍이 걱정하시겠다. 혹시 아방도 돌아오셨을 수도 있고……."
표정을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기정은 달래의 목소리에 걱정이 깊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달래의 걱정이 아니더라도 기정 역시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수시로 다니던 숲이 평소 다니던 곳과는 뭔가 다른 묘한 느낌을 주는 것만 같았다. 평소 겁이 별로 없었던 기정에게 불안한 기분이 스치며 두려움이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