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주택을 둘러싼 돌담 너머로 흐릿하게 빛이 새어 나왔다. 규모는 작지만 안거리(안채)와 밖거리(바깥채) 외에 모로 지은 모거리(별채)가 한 채 더 있는 집이다. 박수는 집을 향해 걸으며 자세히 살폈다. 늦은 시간이라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절대 호롱불을 밝힐 일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기에 걱정과 두려움이 일었다. 이미 두텁게 쌓인 걱정이 한층 깊어졌다. 아내가 자신을 기다리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어차피 밤 늦게 혹은 해가 뜰 때나 되어야 도착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싼 기름까지 태워가며 기다릴 일이 없었다. 뭔가 변고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집까지는 기껏 코 앞이지만 마음이 급해져 걸음이 빨라졌다. 박수의 눈에 키가 작은 아내의 머리가 돌담 뒤로 보였다.
"여보~"
박수보다 아내가 먼저 발견한 모양이었다. 아내는 돌담 밖으로 뛰어나와 박수의 손목을 잡았다. 아내 도지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박수는 예상했던 불편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했다. 할망 아니면 아이들 문제겠지만 할망은 기도하러 갔기 때문에 아이들 문제일 게 뻔했다. 도지는 이내 눈물을 쏟아냈다.
"기정이하고 달래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
"대체 애들은 어딜 갔소?"
박수는 답이 나올 수 없는 뻔한 질문이란 걸 알면서도 물었다. 예정 없이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어딜 간다고 말하고 나갔을 리가 없다. 도지는 해가 저문 후에도 아이들이 갈 만한 곳을 뒤지며 소리를 질렀다. 미리 챙겨 나갔던 횃불도 화기가 다해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지만 지금까지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 지게 위의 아이를 본 도지가 멍한 표정으로 박수의 얼굴을 살폈다. 박수는 지게 위에 누이 명수를 닮은 아이를 기절한 채 있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아! 이 아이는……. 부모가 죽었는데 버리고 올 수도 없고……. 자초지종을 얘기하자면 너무 복잡하니 우선 아이들 찾으러 다녀오겠소!"
박수는 지게를 내려놓고 난간(툇마루) 아래에서 횃대를 꺼내 들고 굴묵(온돌 아궁이)으로 향했다. 굴묵 안에 쑤셔 넣은 횃대는 금세 불을 밝혀 집 주변을 환하게 밝혀 주었다.
"아이들 찾아오겠소. 걱정 말고 이 아이도 좀 챙겨 주시오."
박수는 도지의 어깨를 두드린 후 삼의악오름 방향으로 향했다. 들위오름 쪽은 도지가 다녀왔다고 했으니 그쪽엔 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 박수는 아내가 안 가본 곳들 중 아이들이 갈 만한 곳을 떠올렸다. 몇 년 전 어릴 적 놀던 비밀의 장소를 기정에게 공유해 준 기억이 났다. 좀 멀긴 하지만 아이들은 이따금씩 거기까지 다녀오곤 했다. 익숙한 곳이라 길을 잃을 리는 없겠지만 밤이 어두워 헤멜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들짐승들의 위협도 걱정이었다. 박수는 사실이 아닌 걱정이 불안을 키운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낮부터 시작된 연속된 불길한 일들 때문에 불안한 마음은 눌러지지 않았다.
"기정아! 달래야!"
박수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다. 들려오지 않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불안함이 가중되어 갔다. 삼의악오름에 올라 횃불을 흔들면 아이들이 볼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이들이 알아볼 리가 없었다. 박수는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어쩌면 아이들이 돌아와 있을 수도 있을 거란 희망이었다. 돌아갈 때에는 서삼봉으로 난 샛길을 타고 넘었는데 오르막 끝에 오르자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지와 기정, 달래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박수는 천 년은 묵은 것만 같았던 답답함이 내려 앉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니 세상 그 어느 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
"곶자왈에 들어가서 아무 풀이나 만지지 말라고 했지?"
처음엔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던 박수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아방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달래는 도지의 허벅지를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기정은 덩굴 통로를 지날 때 정체를 알 수 없는 독풀에 쓸려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독풀 이야기를 마친 기정은 천둥소리와 함께 이상한 사람들에게서 도망쳤던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박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고 말았다.
"기정아! 네가 본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기억하니?"
"아뇨! 멀리 있어서 모습을 제대로 못 봤는데 목소리는 기억해요. 그리고 오름 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 같았어요. 어떤 할망과 어멍들이 슬프게 울고 있었어요."
박수는 낮에 본 총살 장면이 생생하게 스쳤다. 그는 도지 옆에 누운 채 아직 깨어나지 못한 명수와 닮은 아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