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9-죽성큰가름

by 루파고

아이를 순사들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이와 꼭 닮은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는 싫었다. 아이의 친척이나 이웃이 누군지 알아야 데려다 줄 수 있을 테지만 그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 부모의 시신을 수습하며 그들 옷가지를 뒤졌지만 신분을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다른 주검들도 마찬가지였다. 군인들은 그들을 죽인 후 신분증을 모두 회수해 간 것이었다. 박수로서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박수의 마음 한편엔 아이를 데려가게 된 걸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이 명수의 화신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아이를 아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 정상이란 걸 알면서도 누군가 아이를 알아보면 어쩌나 싶었다. 박수의 마음은 어지러웠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눌러야 했다. 박수는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게 아닌가 자문했지만 자신의 판단이 최선이라는 걸 확신했다.

삼성혈이 가까워지자 박수의 눈에 또 한 무리의 군중이 보였다. 왠지 아까 목격했던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을 것 같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현장을 확인하고자 하는 호기심이 일었지만 등에 진 아이 때문에라도 지나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는 일부러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길로 돌아서 길을 재촉했다. 아이는 죽은 듯 업혀 있었다. 한순간에 부모를 잃은 상황이라 하더라도 지금껏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삼성혈이 보이지 않을 만큼 벗어난 박수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총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놀란 군중들의 비명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도 반발하거나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사망한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선량한 사람들로 보였다. 군인들은 정상적인 재판 과정도 없이 사람을 죽이고 있었다. 군인들의 마귀와 같은 모습에 치가 떨렸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보면 고통 없이 사망한 아이의 어멍은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수는 아이가 깨어나 부모를 찾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다독여야 하나? 박수는 누이 명수가 목을 매달고 죽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의 삶에서 가족의 죽음을 맞은 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세상이 무너진다는 느낌, 세상엔 오직 어둠만 존재하는 느낌, 누이 명수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만 같은 느낌, 살아 무엇하나 싶은 절망, 세상의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박수가 누이의 죽음 앞에 놓였던 때와 달리 아직 사리분별이 어려운 아이가 느낄 슬픔의 강도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가족을, 특히 부모를 잃은 슬픔을 어찌 알 수 있을까? 박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상태로 걸었다. 그는 눈앞에 펼쳐지는 길을 무의식적으로 인지하며 걸었다. 경사가 조금씩 가팔라지는 오르막길도 본능적으로 걸었다. 그가 사는 곳까지는 쭉 그런 식의 오르막길이 이어져 있었다.

멀리 한라산이 보였다. 백록담이 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눈이 쌓였던 백록담은 하얀 옷을 벗고 세로로 쭉쭉 그어진 희끗한 절벽을 드러냈다. 길은 조금씩 좁아지고 있었다. 이제 큰 마을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은 다 지났다. 작은 마을 몇 개와 기껏 해야 무당집, 백수, 미친 사람들이 사는 집이 한두 채 정도 띄엄띄엄 존재한다. 마을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나 어쩔 수 없이 마을을 떠난 사람들이 홀로 사는 집이다. 좀 더 올라가면 소나 말을 키우는 사람들의 움집이나 몇 채 보일 것이다.

박수의 오른쪽 너머 쪽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해가 기운다 해도 빛의 여운으로 길을 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다행히 오늘은 보름이라 달이 여느 때보다 밝았다. 구름이 달을 가리지만 않으면 산길을 걷는 것도 무리 없다. 게다가 조금만 더 가면 죽성큰가름 마을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거기서 빠른 걸음으로 두 시간이면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까지 갈 수 있다. 박수는 이미 한참 전부터 배가 고팠지만 쉬어갈 여유가 없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밤길에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마지막 마을인 죽성큰가름을 지나면 길이라고 할 만한 길도 없다. 집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길은 점점 더 험해진다.

죽성큰가름 마을 사람들 중 박수 가족들과 교류하는 사람은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 가족은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그렇다고 누가 먼저 교류를 시도한 적도 없었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절된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서로의 존재를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그들의 할망, 또 그들의 할망, 또 그들의 할망에게서부터 박수의 집안과는 교류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박수의 집안은 대대로 설문대할망을 모셔왔다. 제주가 탐라인 시절에도 도이, 동영주, 섭라, 탐모라, 탁라인 시절에도 사람들은 그들 집안을 두려워했다. 동경의 대상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존경을 받기도 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박수의 집안을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들과의 소통이 줄어들었다. 박수는 일반 사람들과 전혀 다를 것 없는 자신의 가족들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반면에 박수 역시 이해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있었다. 제주도를 창조했다던 설문대할망은 여신이다. 그래서 집안의 내력은 대대로 여자에게만 계승되었다. 박수가 호기심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대로 자식이 많지 않았던 걸로 아는 그들 집안에서 어떻게 여신을 계승할 대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것인지, 씨는 남자에게서 나오는데 어떻게 여신을 계승할 씨가 이어지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성인이 되어서도 할망은 그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태양이 한라산 서쪽 겨드랑이 아래로 딱 떨어지고 있었다. 박수는 드디어 죽성큰가름 마을이 가까워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입구에 있던 움막 때문이었다. 오래전엔 사람이 살았던 것 같은 돌집인데 몇십 년 동안 방치되어 돼지우리처럼 쓰고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집을 떠나올 때만 해도 있었던 돼지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섯 마리는 족히 넘어 보였던 돼지가 전부 사라진 것이다. 마을에 잔치가 있다 해도 그 많은 돼지를 다 잡아먹었을 리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누군가 이런 깊은 산속 마을까지 와서 돼지를 훔쳐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박수는 본인이 관여할 일도 아니기에 그저 고개를 갸웃하며 지나쳤다. 하지만 하루 종일 벌어진 이상한 일들 때문에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여명도 사라진 검푸른 하늘빛에 산길 바닥이 어렴풋이 드러났다. 박수는 바닥 상태를 살피며 조심조심 한 걸음씩 옮겼다. 마을이 조금씩 가까워지며 아이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이야 울 일이 많은 일이지만 이 역시 박수의 불안한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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