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래의 비명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옆으로 한참을 굴러 떨어지던 기정은 무게중심이 틀어지는 걸 느꼈다. 하마터면 몸이 뒤로 뒤집어질 찰나였다. 운이 좋았는지 짧게 자란 넝쿨이 눈에 들어왔다. 기정은 자기도 모르게 넝쿨을 부여잡았다. 잠시였지만 구르는 속도가 줄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힘이 없는 넝쿨은 기정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쭉 늘어졌다. 기정의 머리가 아래쪽으로 돌아갔고 등으로 바닥을 밀며 떨어졌다. 기정은 좌우를 살피며 뭐라도 잡을 것을 찾았지만 겨우내 누렇게 시들어 힘이 빠진 들풀만 보였다. 맨손으로 잡는다 한들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눈을 질끈 감아버렸을지도 모른다. 혹은 두려워한 나머지 자포자기했겠지만 기정은 달랐다. 어린 기정은 아버지 박수에게서부터 어떤 일이 있어도 달래를 지킬 수 있는 오빠가 돼야 한다고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기정은 또래 아이들보다 남다른 기질이 있었다. 게다가 지금 상황 역시 달래를 지켜야 한다는 막중한 의무감이 기정을 움직이게 했다. 하늘이 도운 걸까, 머리가 뒤로 떨어지기 전에 가까스로 잡은 넝쿨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만약 계속 굴러갔다면 불과 몇 초 후에 묘를 두른 담에 머리를 받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정은 다시 자리를 잡고 일어섰다. 희뿌연 흙먼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불과 몇 초였지만 어른 키로 열 명 정도는 되는 거리를 미끄러진 것이다. 팔꿈치 안쪽에 불이 난 것처럼 따가웠지만 다행히 뼈가 상하거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달래의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방금 전 하늘을 울렸던 이상한 천둥소리 때문인가 싶었다. 겁을 먹은 달래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기정을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넝쿨로 얽은 달래의 신발이 가파른 경사에 조금씩 미끄러지긴 했지만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라며 기정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기정은 자신의 안위보다 추락하는 오빠의 모습 때문에 놀란 달래가 더 걱정이었다.
달래가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동안 기정은 달래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마지막 한 걸음에 미치자 달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달래는 오빠의 손을 잡을 때까지 꿋꿋이 참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글썽거리던 달래의 눈물은 오빠의 손이 닿자마자 주르륵 흘러내렸다.
"달래야. 걱정했지? 그래도 내려가서 울자. 여기서 이러면 위험할 수도 있어. 이런 길로 널 데려온 오빠가 잘못했어. 미안해."
대단하게도 달래는 기정의 말에 눈물을 뚝 그쳤다. 기정은 달래가 기특하기만 했다.
"그런데 아까 그 소리는 대체 뭐야?"
소매로 눈물을 훔친 달래가 물었다.
"모르겠어. 나도 처음 듣는 소리야. 이런 맑은 날 천둥이 칠 리도 없는데 너무 이상하다. 정말 할망 이야기처럼 신령님이 낸 소리 아닐까?"
"그런가? 하지만 할망 이야기 중엔 그런 건 없었던 거 같은데……."
"모르지 뭐, 할망 이야기는 많아도 너무 많으니까."
기정의 말에 달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는 남은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경사가 심해서 한 걸음이라고 해봐야 겨우 발 하나 정도였다. 딱히 발을 디딜 틈도 없는 오름은 발을 디딘 채 버텨내기도 힘들었다. 발가락에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기정의 발바닥엔 땀이 흥건했다. 경사가 약해지는 부근까지 어른 키 두 배 정도 남았을까, 기정은 오름 위쪽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기 애들이 있다!"
사람 목소리가 오름 아래쪽으로 내리찍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그냥 쏴!"
"아직 아이들이잖아요."
기정은 오름 위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 세 명이 기정과 달래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기정은 사람들에게 좋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알 순 없었지만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 사람은 제주말을 쓰는 것 같고 다른 사람은 처음 들어보는 말투였다. 기정은 이상한 천둥소리와 사람들이 슬피 우는 소리에 뭔지 알 수 없는 연관성이 있을 거라는 느낌을 받았다.
경사가 약한 곳에 닿자 기정은 달래의 손을 잡고 내려가는 속도를 높였다. 이제는 미끄러진다 해도 다칠 만한 돌부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름 위쪽에서는 사람들이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새끼야! 쏘라니까!"
한 남자의 욕설과 함께 다시 천둥소리가 들렸다. 기정은 달래의 손목을 꽉 잡고 가시덤불 사이로 다시 기어 들었다. 천둥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다투는 소리는 계속됐다. 공포에 질린 두 아이는 가시덤불 깊숙한 속으로 빠르게 접어들었다.
"오빠, 등 뒤에서 물이 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