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게나!"
박수는 오른팔 뒷섶을 잡아끄는 손길을 느끼며 돌아보았다. 기껏 열댓 살 정도 아이 만한 조그만 하르방이었다. 새까만 피부에 거칠고 쭈글쭈글한 이마의 주름살은 그가 살아온 세월의 두께가 느껴질 정도였다. 턱 아래쪽으로 길게 그어진 흉터는 쭈글쭈글한 주름과 묘하게 어긋나 보였다. 박수의 옷깃을 부여잡은 하르방의 손은 왜소한 체구에 비해 어색할 정도로 컸다. 손가락 마디마디는 나이답지 않게 두텁고 질겨 보였다. 왠지 야생동물의 가죽을 뒤집어쓴 듯한 손이었다. 그의 손등에도 온통 흉터들로 가득했다. 흉터라는 걸 쉽게 알아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 까만 피부 군데군데 새살처럼 돋아 튀어나온 부분 때문이었다.
박수는 얼떨떨한 느낌으로 왜소한 하르방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은 성인 머리 네 개 정도의 차이였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하르방의 외모와는 달리 눈빛은 깊고 맑았다. 마치 언젠가 우연히 발견한 한라산 자락의 깊은 옹달샘 같은 눈빛이었다. 박수는 자기도 모르게 노인의 눈 속으로 빨려 드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흔들고 다시 하르방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숫기가 없는 박수는 딱히 어떤 말을 이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아주 잠시였지만 부풀어 오르던 증오가 한결 내려앉은 걸 알 수 있었다. 찰나의 순간에 감정이 오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참아야지. 참아야 해. 앞으로 험난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깐 일로 부대끼면 안 되네."
하르방은 박수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박수는 처음 보는 하르방의 손짓에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아늑함 같은 거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방의 현신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상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현실감을 찾은 박수는 또 머리를 흔들었다.
"하르방은 뉘신지요?"
"나야 그냥 많고 많은 하르방 중 하나일 뿐이지, 난 그저 언제 죽을지도 모른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일세. 아무튼 잠자코 아이를 데리고 빠져나가게. 그게 자네가 할 일 같구먼."
박수는 하르방의 말을 듣고서야 주위를 살폈다. 군중들은 이미 박수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이의 어멍은 군인 둘이 거적데기 마냥 구석에 던져 버렸다. 금수만도 못한 짓이었다. 박수는 저도 모르게 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르방의 말이 생각나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하르방은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작은 체구라 군중 속에 있어도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박수는 혼절해 버린 아이를 안아 들고 돌아 나왔다. 박수는 떼 지어 몰려 있던 인파를 헤치고 나온 후에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명수의 현신라는 생각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할망에게 명수를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 아이마저 무당으로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닐까 염려스러웠다. 박수는 부모를 잃은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품 안의 아이는 두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박수는 설마 하며 아이의 가슴에 귀를 대 보았다. 숨이 끊어진 게 아닌가 싶은 걱정이었다. 다행히 작게나마 콩닥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박수는 이미 자기도 모르게 아이를 명수에 대입하고 있었다.
박수는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길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이의 부모 시신은 챙겨주고 떠나는 게 도리 같았다. 그새 박수는 아이를 거두기로 작정한 것이다. 할망과의 불화가 예상됐지만 일단 그런 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 도지 역시 이 아이를 내치거나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기정과 달래 역시 또래라 잘 어울려 줄 것이라 믿었다. 박수의 생각은 다시 하르방에게 옮겨갔다. 하르방의 깊은 눈동자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잠시 놓치고 있었지만 그가 했던 말도 떠올렸다.
'앞으로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이깐 일로 부대끼면 안 되네.'
온몸이 만신창이 같던 하르방, 평생 편안한 삶을 살아본 적이 없을 것만 같던 하르방, 그의 전혀 일반적이지 않은 외모엔 박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절대 알아볼 수 없는 심오한 뭔가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앞으로 어떻게 어떤 삶을 살게 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미래를 어떻게 내다본 걸까 싶었다. 인간의 삶이란 게 원래 험난한 일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대체 그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이깐 일로 부대끼면 안 된다며 생면부지의 자신을 뜯어말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시계 같은 게 없는 박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사람들이 조금씩 흩어지는 게 보였고, 관덕정 앞 광장엔 군인들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이 부모의 몸뚱이가 내던져진 곳엔 그들 말고도 네 명의 시신이 쌓여 있었다. 사람의 시신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층층이 대충 쌓아놓은 걸 본 박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군인이 자리를 떠나자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시신 쪽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는 게 보였다.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박수는 일본 놈들도 저런 짓은 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이는 폭신한 수풀 위에 반듯이 눕혀 두었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나던 군인이 자꾸 뒤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그 역시 윗사람이 시켜서 그랬겠지만 인간적인 도리로서 마음이 편할 리가 있었겠나 싶었다. 박수는 대체 저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어 죽음으로 죗값을 치러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재판 같은 것도 없이 사람의 목숨을 한순간에 끊어버리는 만행이 왜 벌어진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인간의 목숨은 새털과 같은가?'
박수는 깊은 곳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뜨거웠다. 그냥 너무 뜨거웠다.